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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다 Oct 27. 2022

엄마의 일생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돌아가셨다고 모든 기억이 미화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감정을 거세한 채 객관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없다. 그 누가 자신의 부모에 대해 정확하게 알 것이며, 어느 누가 그 인생에 대해 단적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인가. 다만 시간에 노출된 채 조금씩 바래져가는 추억들, 모래알처럼 다 흩어져 사라지기 전에 엄마의 인생에 대해, 내가 아는 아주 작은 일부분을 기록해본다.



  젊은 시절, 어머니와 나는 그렇게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솔직히 나는 어머니를 구식이라고 생각했고, 때로는 말이 안 통한다고 답답해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33년이라는 세월의 강을 가로질러 뜻이 잘 맞고 말이 잘 통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보기 드문 일일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랐고,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주장하기도 하셨으니 간혹 고루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남편에게 순종적인 아내인 것은 아니었다. 부부싸움을 하실 때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해서 더 아버지 화를 돋우었다. 어릴 적엔 잘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결혼해서 살아보니 속병 안 만들고 할 말 하고 사셨던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어렸을 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외할아버지가 바람기에 질린 외할머니께서 점괘를 보고 부자는 아니지만 바람은 안 피운다는 아버지와 결혼을 시키셨다. 두 분의 전통혼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어머니도 고왔지만 아버지가 무척 곱상하게 잘 생기셨다. 그 외모에 반하셨을까, 어머니는 아버지 속옷까지 다림질해 놓으셨다고 했다.

  중학교 선생님인 아버지와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으나, 장녀는 어릴 때 홍역에 걸려 먼저 부모 곁을 떠났다고 한다. 그것도 농사를 짓는 시부모님께 잠깐 맡겨놓았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한 번도 그런 말씀을 안 하시다가, 어느 날 옛날 흑백사진을 발견한 우리가 누구인지 물으니 그제야 말씀하셨다. 시댁에서 아이를 병원에 빨리 데리고 갔으면 살았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그렇게 어여쁜 아이가(우리들과는 다른 아이였다고 표현하셨다) 죽었다고 엄마는 원통해하셨다. 부모님이 소식을 듣고 본가에 갔을 때는 이미 맏이는 선산 어딘가에 묻히고 난 후였다. 당시에는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묘 자리를 만들지 않는다고 하셨단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온 산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어머니의 발목을 붙잡는 것 같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종갓집 장남인데 엄마가 줄줄이 딸만 낳았으니, 비록 시부모님과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눈치가 많이 보이셨을 터이다. 딸 셋 다음으로 사내아이를 낳은 후, 엄마의 우주는 외아들인 오빠를 중심으로 돌았고, 종종 '그 애가 내한테 어떤 아이인데'라는 말씀도 종종 하셨다. 그렇게 떠받들어 귀하게 키운 아들은 영특했지만 모난 성격에 아버지와의 불화로 마음이 아팠고, 몸도 허약했다. 오빠와 나는 둘 다 결혼을 늦게 했고, 여러 가지로 제일 부모님 속을 많이 썩여 드렸다.

  어머니는 아들 하나 더 낳으려고 했는데 딸인 나를 낳았고, 딸인 줄 알았으면 안 낳았을 거라는 이야기를 친언니나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듣고 자랐다. 어머니 자신은 딸과 아들을 심하게 차별 대우하면서 키우지는 않으셨다고 믿었다.


  아버지의 치명적인 문제로 부부싸움의 주제는 술이었고, 돈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젠가 아버지를 아는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느그 아부지 아직도  드시나?' 하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버지는 애주가셨고 때로는 알코올 중독자로 느껴지기도 했다. 아버진들 얼마나 힘드셨을까. 다섯 식솔이 아버지만 쳐다보고 있는데, 최소  시간 이상 되는 시골로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셨으니 말이다.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세간살이를 던지며 부술 때도 있었지만, 어떨  엄마 손을 잡고 '젖은 손이 애처로워~'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다.

  시골에서는   사는  딸로 곱게 자랐던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현모양처가 되셨을지도 모른다. 공부는 좋아하지 않아 중학교만 졸업하셨는데, 가끔은 공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였을까. 박완서나 한국의 여류 작가들 책을 가끔 작은 소리로 입술을 달싹이며 읽으셨는데, 시력이 나빠지면서 책보다는 텔레비전을  좋아하셨다.


  여자로서의 어머니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일까. 어머니는 요리를 잘하셨지만, 나이가 들수록 음식이 맛이  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인스턴트 음식은  드시지 않았고 전자레인지로 음식을 데우는 것도 싫어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후에는 점점 음식 하는  귀찮다면서 커피 한잔과 초코파이로 아점을 드시기도 하셨다. 좋은 고기를 사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친정집에 가면  좋은 소고기나  좋은 생선 같은 것을 신문지에 싸서 주셨다. 어머니의 손맛을 물려받지 못한 것이 아쉽다. 지금은 어디 가서도 입맛에 딱 맞는 엄마 밥상을 대할  없으니까 말이다.


  어머니는 예쁜 옷이나 외모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평생 전업주부로 아버지가 벌어오는 적은 돈으로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셨고, 그러면서도  번씩 백화점에 가서 소파고 옷이고 충동구매를 하시는 일도 더러 있었다.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사주신  옷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런 기억은 황홀해서  잊히지 않는 법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단골 의상실에서 옷을 맞춰 입기도 하셨는데, 아직도 의상실에서 맞춘 언니의 블라우스와 원피스가 생각이 난다. 중학교 때였는지 당시만 해도  욕심이 있었던 내가 편물 스웨터  달라고 어머니께 조른 적이 있다. 비싼 양모 실로  오묘한 색의 풀오버는  마음에 들지 않았고, 고모가 사촌언니에게   니트처럼 멋지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편물이 유행이라 많은 엄마들이 손뜨개로 옷이나 목도리 등을 셨다. 엄마가 오로지 나를 위해 떠주신 베이지색 스웨터 고모가 떠주신 아이보리색 풀오버와 함께 아직도 소중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어머니는 연세가  되셨을 때도 발이  불편하고 비실용적이라도 보기에 예쁜 신발을 구입하셨다. 옷에도 신경을 쓰셔서 편찮으시기 전만 해도  쇼핑을 좋아하셨다. 멋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분에 넘치게 과소비를 하지는 않으셨다. 그에 비해 어머니의 딸들은 나이가 들수록 옷이나 외모를 꾸미는  무관심한 편이니 아버지를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젊은 시절엔 집에만 계셨던 어머니가 점점 밖으로 돌아다니게  것은 아버지가 퇴직한 이후였던  같다. 낯을 가려서 노인정 같은 곳에는 절대 가지 않으셨고, 동사무소의 문화예술 강좌나 의료기, 친한 지인을 따라 화장품, 건강보조제품 판매하는 곳에 자주 가셨. 다른 사람에게 팔지는 못하시고 주로 어머니께서 필요한 이상으로 구입하셔서 우리에게도 주고 창고 방에 쌓아 두실 정도로 인정에도 약하셨다.


 내가 남편과 같이 못 살겠다고 쪼르르 친정으로 가거나 전화로 하소연을 할 때면, 어머니는 조용히 듣다가 참고 살아야 된다고 하셨다. 왜 맞벌이인데 여자만 아무것도 못하고 희생하며 살아야 하냐고 했을 때 '원래 여자는 그런 거다'라고 말씀하셨던 어머니.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나를 달래고 품어주셨던 어머니가 계셨기에 아직도 남편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거울을 들여다보면  얼굴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한다.   중에서 가장 어머니와 얼굴이 닮은 딸이기에 어머니가 그리우면 거울을 보면 된다고  농담 삼아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내게 주셨던 모정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다. 어머니가 내게 주신 사랑과 희생은 나를 통해 우리 아이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오늘 문득 생각해본다.



# Bgm. 어머님께/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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