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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동협 May 08. 2021

뱀을 밟은 아이

육아일기를 처음 쓰게 한 사건

서울에 계속 살았더라면 겪지 못했을 경험을 며칠 전에 했다. 처음 미국 유학을 떠날 때는 뉴욕이나 시카고 같은 멋진 대도시에 사는 걸 꿈꿨는데, 결국 미국에서도 오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드라마 ‘초원의 집’ 배경이 된 사우스다코다 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 정착했다.


대도시에만 살았던 내게 자연은 언제나 낯설었지만, 이제는 길에서 토끼, 사슴, 너구리나 다람쥐를 만나는 일은 예사였고 매나 독수리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 옐로스톤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자연을 만끽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어지간한 야생동물은 다 봤지만, 그 날 본 동물만은 내게 아주 특별했다.


평소에 아이와 함께 자주 다니던 공원에 우리는 쉬엄쉬엄 산책하러 나갔다. 두 돌에 가까워지며 아이의 활동성이 부쩍 강해져 이제 따라가기도 벅찰 정도가 되었다. 물 근처나 가파른 곳처럼 위험한 곳에서는 내가 밀착 방어를 하는 경호원이 되어 바싹 따라붙어 다니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선 아이가 자유롭게 놀게 풀어주는 편이다.


아이가 말띠라서 그런지, 아니면 사내아이라 그런지 문밖만 나서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닌다. 에너지가 차고 넘치는 아이라 하루 꼭 한 번은 이렇게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다.


울타리를 쳐놓고 그 안에선 마음껏 뛰노는 말처럼 키우려고 평소에 자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상상했던 가상의 울타리가 반드시 안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공원에서 마음껏 뛰노는 아이

그날도 공원의 너른 잔디밭에서 마음껏 놀게 해 주고 나는 천천히 그 뒤를 따라다녔다. 여름을 맞이한 화단에는 만개한 노란 꽃의 향기가 그윽하니 운치가 있었다. 아이는 꽃을 한참 서서 구경하더니 갑자기 화단 뒤쪽으로 난 자갈밭 길에 들어섰다.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자갈의 감촉이 좋은지 히죽거리며 걷길래 나도 쫓아가며 웃다가 걷다가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몰랐다. 자갈밭에서 한참 놀다가 빠져나와 다시 풀밭을 걷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보이는 엄마를 부르며 아이가 달려가는데 그 앞에 꽤 기다란 나뭇가지가 놓여 있었다. 혹시 걸려 넘어지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얼른 치워주려고 재빨리 쫓아갔다.


그런데 뛰어가며 얼핏 살펴보니 나뭇가지에 줄무늬가 규칙적으로 보였고 윤기까지 반짝반짝 흐르는 게 꼭 살아있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했다. ‘아, 이건 뱀이다!’ 그런데 말릴 겨를도 없이 아이가 뱀을 사뿐히 밟고 지나갔다. 둔탁하게 뱀 밟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뱀은 미동조차 않고 가만히 있었다.


혹시 죽은 뱀이었을까? 아니면 뱀의 껍질만 남은 걸까? 그런 생각이 떠오른 찰나 나는 잽싸게 아이를 낚아채 안전해 보이는 곳으로 질주했다. 동네 산에서 방울뱀도 자주 나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방울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마구 쿵쾅거렸다.


풀밭을 벗어나 뒤돌아보니 길이가 족히 2m나 되는 뱀이 고개를 꼿꼿이 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뱀이 작정하고 달려들었으면 아이는 상대도 되지 못했을 거다. 아이가 마침 반바지를 입고 있어서 더욱 아찔했다. 제법 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위협적이라서 나도 모르게 슬슬 뒷걸음치게 되었다.


뱀이랑 이렇게 눈을 마주쳐 보긴 실로 오랜만이다. 중학교 사생대회 날 그림 그리러 산에 올라갔다가 등산로에서 어린 실뱀 한 마리와 맞닥뜨린 적이 있다. 그때는 그 뱀이 나를 보고 더 놀라서 먼저 달아났지만, 이번 뱀은 달랐다. 미국 뱀이라 그런가? 크기도 엄청 크고 위세가 당당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등골이 오싹했다.


몇 초간 혀를 날름거리며 이쪽을 바라보는데 검은 시선이 나를 관통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그 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유유히 가던 길로 스르르 기어갔다. 나는 멀찌감치 숨어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 뱀에게는 강자의 여유마저 풍겼다. 사람의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섬뜩하고 강렬한 그 눈빛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마 평생 기억하게 될 그런 눈빛이었다. 그 날 우리 부자는 운이 좋았던 게다.


돌아오는 길에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뱀이 독사였으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아이가 뱀에게 물렸으면 내가 응급조치는 잘할 수 있었을까? 내가 본 게 정말 뱀이 맞았을까? 의구심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그건 아내랑 함께 봤기 때문에 틀림이 없는 뱀이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공원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심각한 사고 없이 그 순간을 모면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공원을 빠져나와 운전석에 앉자마자 맥이 탁 풀렸다.


뱀이 출현한 장소

복잡한 나의 심경을 알 길 없는 아이는 편안히 의자에 기대고 앉아 토마스 기관차 동영상이나 보며 태연하게 웃으며 신이 났다. 저 아이는 뱀이 무엇인지도 아직 알지 못하니 당연한 행동이다. 하여튼 두 돌도 되기 전에 뱀을 밟아본 아이는 세상에 몇 안 되겠지. 그 일을 겪고 나서 그 날 나는 작은 결심을 하나 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공원 한가운데 그것도 대낮에 뱀이 나올 줄 몰랐듯이 세상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아이랑 놀아줄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그동안 아이와 안 놀아준 건 아니었지만, 40대 중반에 접어든 내 체력의 한계를 느껴서 함께 노는 걸 약간 등한시한 면도 없지 않았다.


체력이 안 되면 체력을 만들어서라도 놀아줘야 한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마 뱀 선생이 그 깨우침을 주려고 깊은 산속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닐까. 세상 도처엔 이보다 더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지 않으면 언제 큰일을 당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생각이 내 마음속에 단단히 똬리를 튼 순간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근처 산에서 마른벼락으로 발화된 큰 산불이 났다. 그 뱀은 산불을 피해 이곳 마을까지 내려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이건 동물이건 제 의지와 상관없이 위험에 노출되는 건 살아있는 한 겪어야 할 운명인가 보다.


무시무시한 테러나 재앙적 수준의 사고가 매일같이 터지는 요즘, 내 한목숨 건사하기도 힘든데 이제 난 아이까지 지켜야 할 영락없는 아빠가 되었다. 뱀을 만난 사건은 아이가 태어나 2년이 다 되어서야 처음으로 육아 일기를 쓰게 한 힘이었다.


벼락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게 한 날, 나는 많은 걸 배우고 아빠의 책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겼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같이 성장하게 된다는 말이 다시금 가슴속 깊이 파고들었다. 이런 경험을 충분히 곱씹을 여유도 없이 뱀처럼 미끄러져 달아나는 아이를 잡으려는 추격전이 오늘도 벌어진다.



커버 이미지 By 류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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