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 녹색 광선
에릭 로메르 감독이 노년에 만든 영화 '녹색 광선'은 1986년에 상영되었고 국내에서는 1990년에 개봉되었으나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에릭 로메르 감독의 수작 중에 하나라고 평가된다.
델핀은 자신의 처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현실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자기 생각에 갇힌 폐쇄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휴가를 2주 정도 앞두고 계획이 취소되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녀는 누군가와 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지만, 아무나 함께 보내기는 싫은 굉장히 까다로운 성격을 지녔다.
그녀가 휴가를 떠나기 전에 하는 일은 모두 휴가에 관련된 일이다. 가족, 친구, 동료들과 만나서 그들의 휴가 계획에 대해서 들어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그녀에게 같이 휴가를 보내자고 제의하지만, 델핀은 적당한 이유를 들어 모두 거절한다. 예를 들어, 언니가 가려는 아일랜드는 햇빛이 적어서 싫다고 하고, 친구가 제의한 여행은 이상향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서 거절한다. 하지만 그녀는 여행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그녀가 강렬하게 원하는 건 자신에게 어울리는 파트너를 만나서 여행을 하는 것뿐이다. 그녀의 소망대로 이뤄지지는 않지만, 우연히 여행 파트너를 구하게 된다. 울고 있는 그녀를 달래주는 프랑수아의 가족이 그녀의 휴가를 동행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그녀가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사는지는 드러나 있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무기력하고, 바보 같고, 소극적인 상황을 탈피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버겁고 지겹다. 권태로운 상황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이 여행이 꼭 필요하다.
그녀에게 여행은 현재의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 다르게 사는 방법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산책하고 친구들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한다.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보내지만,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지 못한 채 결국 울어버린다. 쉘부르 해변에서 그녀는 숲길을 거닐고 돌아와 다른 곳으로 갔고, 산으로 가서도 산책 후에 마음이 변해 파리로 돌아가 버린다.
그녀의 여행은 자신을 벗어나는 일이며, 동시에 색다른 타인과 시간을 공유하는 시간이다. 프랑수아의 가족, 엘레나와 비아리 역에서 만난 남자는 그녀에게 색다른 타인이다. 그녀는 이들을 만나서 얘기를 하는 동안 자신을 잊게 되지만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되면 이들을 떠난다. 타인이 타인으로서 남아있을 수 없게 된다면 그녀는 언제나 새로운 타인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녀가 원하는 바는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서 자신을 잊고 지내는 것이다. 그녀는 타인이 자신의 세계로 파고 들어오는 것을 강력하게 저항한다. 그녀의 친구들과의 파티에서 빨간 옷을 입은 친구가 그녀를 비난하며 현실을 직시하라고 했을 때 겨우 5분을 같이 있으며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하며 질책한다.
그녀가 채식주의자라고 프랑수아 가족에게 말할 때 자기 뜻만 내세우고 그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또 여자아이가 델핀의 남자 친구에 관해서 묻자 그녀는 남자 친구가 많다고 이야기하거나, 누가 물어보라고 했느냐며 은근히 대답을 회피한다. 그녀가 자신의 방식을 고수한다는 점은 채식주의에 이미 내재하여 있다. 그녀는 자신의 방식으로만 타인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https://youtu.be/q1aar4IDUvU?si=CqQkYKGaPU3WO0S2
델핀이 삶을 표현하고 유지하는 방식은 '거짓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녀는 병적인 거짓말을 하여 남들을 교묘하게 속이고 자신은 숨어버린다. 그녀가 만난 스웨덴 여자는 델핀의 생각을 대신해서 직설적으로 말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되고 냉소적이고 차갑게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델핀의 거짓말은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 향해 있어서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우선 타인에게 하는 거짓말은 남자 친구가 많지 않은 데도 많다고 하거나, 약속이 없는 데도 있다고 한다. 가족과 여행을 떠나려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햇빛이 적어서라고 속인다. 그녀가 타인에게 하는 거짓말은 자신을 방어하고 편하게 지내려는 의지가 강하다.
델핀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거짓말을 한다. 그녀가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원인이 바로 내적 거짓말 탓이다. 우선 그녀는 타인에 대해서 잘 받아들이고 관찰을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타인을 잘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친구들과 식탁에서 대화를 살펴보면 이들은 동등한 입장에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친구들이 델핀에게 물어보고 그녀는 친구들에게 자기 생각을 피력하고 자신을 옹호한다. 그녀는 휴가 계획이 무산되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친구들의 조언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그녀는 친구들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들어주기만 원하지 자신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프랑수아 가족과 식탁에서 나눈 대화는 자신의 채식성을 설명한다. 그들이 그녀에게 동물성을 옹호하며 말할 때 그녀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식물이 가볍다거나, 경제적이라는 맥락에 닿지 않는 이유를 들어 완강하게 자기 뜻을 펼쳐 보인다.
그녀는 남자들은 쓸데없는 농담만 하며 섹스만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치부한다. 그녀는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려고 한다. 그녀의 문제점은 타인에 대한 몰이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은 타인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녹색 광선'을 접하면서 변화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혼자 산책하며 돌아다니지만, 그녀는 정착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삶이 지겨워지면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녀는 현재의 나이, 파리를 떠나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정착하려 한다.
사람들을 피해서 혼자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는 것이 행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녀의 본래의 마음과 다르고 그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내어 자신에게 강요하는 셈이다.
그녀가 사람들에게서 실망하고 혼자 산책에 나섰다가 우울한 기분이 되어 흐느낀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거북해하면서도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간절히 염원한다. 그녀는 사람과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지 못하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고 믿는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낸 개인적인 세계에 충실하게 살려고 했지만, 모순적인 상태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한 내적인 거짓말을 참말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출구를 '녹색 광선'에서 찾았다.
녹색 광선의 세계는 그녀의 모순이 극복되는 이상적인 세계이다. 녹색 광선을 예견하게 만드는 사물은 그녀 주변에 언제나 뿌려져 있다. 그녀는 길을 걷다가 우연히 녹색 카드를 줍게 된다. 그녀가 첫 번째 카드를 줍게 되는 시점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지점과 겹친다.
스페이드 퀸은 그녀의 상징이며 자신의 별자리인 산양좌의 성격과 연결된다. 잡지에 해설된 그녀의 운세는 산을 홀로 오르는 고집 센 공주이자 여사제다. 타인과 떨어져 낯선 길을 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는 것이 첫 번째 카드의 의미이다. 두 번째 카드가 발견된 시점은 타인과 공유된 자아를 발견하는 지점이다. 두 번째 카드는 하트 킹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뜻한다. 그 카드를 발견한 후 '녹색 광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녹색 광선이 비칠 때 타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는 쥘 베른의 관점을 델핀은 받아들이게 된다. 두 번째 카드가 발견된 후에 델핀은 이상형의 남자를 만나서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그곳에서 드디어 '녹색 광선'을 보게 된다.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모순을 벗어난다.
빛의 프리즘에서 녹색은 가장 강한 빛이면서 굴절이 제일 심하다. 그래서 이미 태양이 수평선을 넘어간 시점에서 하늘에 퍼진다. 비록 현재에 그 빛은 남아 있지만 이미 사라진 과거를 뜻한다. 녹색 광선이 주는 메시지는 과거에서 왔다. 빛의 굴절이 가져다준 순간의 환영이지만 암시적으로 현재 속에 여전히 살아있는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녹색 광선'이다.
델핀은 녹색 광선을 통해서 현실의 틈에 감춰진 과거의 잔영을 살펴본다. 결국, 델핀은 현재를 과거와 연결해서 확장된 의미를 만든다. 델핀은 현재의 특정한 부분에 머무르지만, 그것을 초월하려는 강력한 의지 때문에 '녹색 광선'을 찾게 되었다. 델핀이 보았던 '녹색 광선'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흐르는 개방적인 시간의 다름이 아니다.
델핀이 생각하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벗어나 과거의 강한 빛의 세계로 숨는 것이다. 녹색이 주도하는 세상은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영화 전반적으로 쓰인 녹색은 식물의 푸른빛을 드러낸다. 숲을 산책하는 장면, 녹색 노을, 녹색 카드, 녹색 옷, 녹색 벽은 식물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델핀이 육식보다 채식을 주로 한다는 것도 이러한 암시와 결합한다. 육식 동물의 세계는 다른 동물에 대한 의존이 강하다. 하지만 식물의 세계는 동물이라는 작은 먹이 사슬보다 전체 자연의 흐름에 따른다. 델핀이 마지막에 보았던 것은 식물이 상징하는 전체 자연의 거대한 흐름이다.
델핀은 녹색 광선을 통해서 대자연의 거대한 맥락을 깨닫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개인적인 세계를 벗어났다. 델핀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 것은 결국 내적 감옥을 벗어나 대자연의 광장으로 나오기 위한 노력이었다. 녹색은 어두운 내면을 벗어나게 한 자유의 빛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