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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동협 Jul 17. 2021

중세의 음유시인

암흑기에서 빛나던 예술가

중세가 연상시키는 이미지는 마녀사냥, 흑사병, 봉건제, 암흑기 등 부정적이다. 특히 암흑기라는 말속에는 일종의 통일된 분위기가 중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중세는 지금 우리가 인식하듯 통일된 형식 아래 폐쇄적으로 갇힌 사회인가? 이런 고민에서 출발하여 중세를 다시 평가하고, 중세에서 살았던 다양한 계층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왕, 귀족, 기사, 성직자, 농노, 예술가의 삶의 양태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놓여있는 시대적 조건도 같이 고려해야지 정확한 이해가 가능하다. 중세의 조건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중세인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중세가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르네상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역사에서 신왕조가 기존 왕조를 부정하는 맥락처럼, 새로운 시대사상인 르네상스는 중세의 세계관을 부정해야 했다. 물론 중세 말기의 극단의 혼돈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세가 암흑이고, 불행했던 시대라고 불리는 것은 부당하다. 초기에 불확실했던 르네상스 정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중세의 정신을 깎아내리고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르네상스의 정신에서 발달한 오늘날의 관점으로 본 중세는 암흑기라고 배워왔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는 실재했던 중세라기보다는 훈육된 허구의 중세였다. 르네상스의 눈을 통한 중세는 이미 중첩된 가치를 담고 있다. 르네상스 초기에는 신 중심의 세계관인 중세와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는 서로 대립했지만, 두 가치가 르네상스의 전개에 따라 인간 중심으로 위계가 정해졌다. 신 중심의 가치는 암흑기의 소산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르네상스의 가치가 개입된 것이다.


중세를 암흑기라는 통일체로 볼 수 없는 것처럼, 음유시인도 단일한 계급으로 볼 수 없다. 음유시인은 귀족도 아니고, 농민도 아니고, 기사 계급도 아닌 복합적인 계급이다. 음유시인들은 귀족, 기사, 성직자, 농민들을 모두 포괄한다. 다양한 계급이 섞여서 이루어진 특수한 형태의 유동적인 집단이다. 음유시인의 사회적 지위가 끊임없이 변해왔다는 것은 다양한 계급을 흡수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건이다.


복수의 계급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각 계급이 지닌 가치가 교류되고, 섞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수의 계급은 자유로운 사상의 긴장을 유발하기 때문에 통일된 의식을 형성하기가 더욱더 어렵다. 음유시인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하나의 특징으로 묶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음유시인은 길드 조직이나, 건축장인 조합처럼 독립된 단체를 구성하지도 못했다. 특정한 지역에 정착하지도 않았고, 사회적 세력으로 조직화하지 못한 음유시인들의 특징을 살피기는 어렵다. 눈에 두드러진 세력은 아니었지만, 음유시인들이 중세시대에 지속해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다. 사회의 응집력을 구성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 음유시인이 지속해서 나타난 것은 출신 계급의 복수성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중세와 음유시인을 동시에 놓고 보면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 자연경제의 봉건제는 확고한 신분 체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음유시인은 신분제의 영역 바깥에 있다. 신분제 자체를 뒤흔드는 기능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봉건영주의 지배 안으로 쉽게 넣을 수 없는 계층이 음유시인이다. 확고한 신분제를 바탕으로 구성된 봉건제와 다양한 계층의 드나듦이 자유로운 음유시인 층은 모순된다. 이런 모순된 체제가 유지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회적 필요에 의해 음유시인이 유지되는 것이라면, 그 필요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중세의 정치와 경제


중세를 하나의 통일된 역사적 시대로 보는 시각은 중세를 이해하는 데 방해된다. 그리스도교의 세계관 안에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정치,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중세가 변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중세를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자연경제에 바탕을 둔 봉건제도 도입기인 초기, 궁정 기사 시대인 중세 전성기, 도시 시민계급의 문화가 중심이 된 말기가 그것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와 중세가 차별되는 것은 교회, 종교(그리스도교)가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봉건제도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의 중세문화가 출현하는 것은 11세기 중엽이다. 봉건제도는 장원에 기초한 자급 자족적 농촌경제이었고, 권력이 지방 영주들에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시적인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봉건제 형성기의 유럽 사회는 전반적으로 유동적이고, 계급체계도 확고하지 못했다. 봉건제는 후기 로마 사회, 그리고 4~5세기의 비잔틴제국에서 점차 생성된 봉건적 토지 소유제도(농노제)와 게르만적인 지도자-추종자 관계가 융합되어 서구 봉건제도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럽적인 의미에서의 고전적 봉건제도가 카롤링 왕조 말기인 9세기 말~1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봉건적 토지 소유관계, 영주와 농노 사이의 인신적 지배 예속 관계의 싹은 이미 4~5세기경부터 자라기 시작했지만 카롤링 왕조 말기, 이슬람, 노르만, 훈 등 여러 변방 민족의 침입 때문에 왕권의 중앙집권적 통제력 및 국방력이 약화하고, 지방 영주들의 세력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중세 서유럽 봉건제도가 탄생하였다.


카롤링 왕조의 왕들은 자신의 지배권이 부분적으로 귀족계급의 지원에 힘입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세력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귀족계급은 중앙권력으로부터 국가행정을 위임받아 관리 자격으로 국가에 봉사했지만, 중앙권력의 경쟁자로 떠올랐다. 왕과 국가가 특히 속수무책이었던 것은 농민들이 그 소유지를 자기네 비호자인 귀족에게 귀속시키고, 다시 나눠 받아서 경작하는 경향이 점점 확산되었다.


봉건제의 전성기에는 영주가 무제한의 권력을 갖게 되었다. 왕은 제후의 한 사람으로서 그 땅을 다스리고 있을 만큼의 권위 이상을 가지지 못했다. 통일적인 행정기구도 없고 국민으로서의 연대감도 없었으며 신화들을 묶어주는 일반적이고 공식적, 법률적인 근거도 없었다. 봉건시대의 국가는 말하자면 추상적인 피라미드형 복합사회였다. 왕은 전쟁의 주관자이긴 하지만 통치자는 아니었다. 실질적인 통치자는 대지주들이었다. 봉건제도는 화폐경제나 교역 없이 토지 소유가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화폐나 교통수단도 없고 도시와 시장도 거의 없어진 만큼 사람들은 되도록 외부 세계에 의존하지 않아야 했고, 외부에서 물건을 사거나 파는 것을 단념해야만 했다. 자급자족적인 경제구조는 필요한 생산만을 하게 되어서 경제적으로 침체하였다.


중세 후기가 되면서 도시 경제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수공업자와 상인이라는 새로운 직업 집단이 발생하였다. 이전의 물품 판매는 생산자 자신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12세기 이후로는 원생산자 이외에 독립해 있을 뿐 아니라 계속 생산에 종사하는 도시의 수공업자들과 독자적인 직업 계층을 구성하는 전문화된 상인층이 발생하게 되었다. 재산이 동산화되고 그 교역, 양도, 축적이 용이하게 됨에 따라 각 개인은 날 때부터 묶여 있던 자연적, 사회적 제약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다.


중세의 예술


예술은 당시의 사회와 관련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중세의 예술도 중세라는 큰 시대 속에서 탄생하였고, 발전 혹은 쇠퇴하였다. 중세는 봉건제와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라도 예술은 그것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중세의 예술은 근본적으로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 특징을 띤다. 이는 성직자 집단과 교회의 세력이 강력하였고, 예술의 주요한 소비층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교회의 벽화, 건축을 통해서 그 흐름이 얼마나 주도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5세기에 서로마가 몰락하고 북방으로부터 야만이 침략하면서 문화 활동은 수도원으로 축소된다. 한때 사람들이 왕래하던 도로에는 더 이상 여행자가 없어지며 군중을 위해 건설되었던 원형극장은 사용하지 않아 황폐해져 간다. 생활은 가난해지고 불안해지며 문화는 낮은 수준으로 떨어져 수 세기 동안 불모 상태에 있게 된다. 7세기경이 되면 로마 시대의 공용어인 라틴어는 성직자 계급을 제외한 일반인들에게는 사어(死語)가 된다.


구로마 제국의 동부 비잔틴제국은 14세기까지 유지되면서 대단히 높은 수준의 예술을 보여주지만, 이전의 영화를 찾지 못했다. 서유럽국가들은 거의 문화적 불모 상태에서 시작하는 수준이었다. 새로운 귀족과 새로운 문화 담당층의 형성은 더욱더 더디게 이루어졌다. 프랑크 왕국은 카롤링 왕조까지도 고정된 수도가 없었으며 왕은 사정에 따라 거처를 옮겨 다녔다. 샤를마뉴 대제에 이르러서야 왕의 세력중심지인 아아헨에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이 형성되게 된다. 미케네 문명을 쳐부수고 반도로 침입해 들어온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행적을 영웅시로 미화했듯이 샤를마뉴 대제는 민족 대이동시대의 영웅들을 노래한 가요들을 수집하고 기록하게 한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가 죽은 후 왕국은 다시 분열되며 헝가리족과 사라센 족 등 이민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워진다.


기독교와 봉건제도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의 중세문화가 출현하는 것은 11세기 중엽이다. 12세기에 정점에 이르는 봉건제도는 장원에 기초한 자급 자족적 농촌경제이고, 권력이 지방 영주들에게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시적이거나 궁정적인 문화를 형성하지 못했다. 그 대신 수도원이 문화담당 주체가 되는데 그 문화적 힘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장르는 건축이다. 중세는 종교적 건축의 시대로 ‘로마네스크’와 ‘고딕’이라는 건축양식을 가리키는 용어가 그대로 이 시대의 예술을 규정하는 단어가 된다. 그리스 시대에 지배적 장르였던 조각은 로마가 기독교화되면서 힘을 잃는다.


중세 문학


중세 문학을 다루기 위해서는 당시의 언어사용 현황을 알아야 한다. 당시 문학은 크게 라틴어 문학과 각국어 문학으로 양분된다. 라틴어는 사회 상류층의 공통어로 주로 교회의 예배나 설교, 대학의 강의나 저술 등에 사용되었다. 각국어, 즉 속어는 유럽의 일반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로 지방어를 말한다. 라틴 문학은 주로 종교적이며 교훈적, 공식적이며, 주로 상류층이 사용했지만, 속어 문학은 주제가 다양하고 당시의 생활과 풍습을 묘사한 것이 많아 일반 대중에게 큰 호소력이 있었다. 이런 이중적인 언어습관은 귀족과 농민의 격차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귀족은 지배를 위해서 속어를 쓰고, 귀족사회의 의사소통과 문화적 생활과 공식적 활동을 위해서 라틴어를 썼다. 음유시인의 경우는 라틴어가 아닌 속어로 불리워졌다는 것에서 그 향유계층을 엿볼 수 있다.


음유시인의 형성


음유시인은 중세에 와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에도 존재했다. 궁정시인은 궁정에서 왕과 귀족 앞에서 그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음유시인은 귀족층뿐 아니라, 민중의 축제, 장터를 찾아다니며 대중적인 노래도 불렀다. 형식적으로 덜 세련되고, 투박하지만 일상회화에도 가깝고, 자유로웠다. 음유시인은 흔히 중세 초기의 궁정 가인과 그리스/로마 이래의 미무스의 혼합장르라고 말한다.


음유시인층의 형성에 관해서는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궁정시인의 몰락, 기사들 자신이 음유시인으로 나서는 것, 수도승의 시인층과 결합, 유랑 학생이 음유시인으로 편입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음유시인층이 정확히 하나의 계층으로 묶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다양한 층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긍정/부정적 영향을 가진다. 음유시의 내용이 풍부할 수 있고, 다양한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결집력이 약하고 집단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로마 시대나 비교적 왕권이 강했던 중세 초기에는 왕들의 수요에 따라서 궁정 가인이 필요했다. 민족 이동기의 영웅을 치하한 영웅 서사시들이 이 시기에 많이 만들어졌다. 왕의 세력이 약해지고, 지방 영주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궁정 가인들도 쇠퇴기에 접어든다. 왕은 궁정 가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재력을 더 이상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후견인이 될 수 없었다. 궁정 가인은 안정된 궁정을 떠나서 자신들의 재능을 알아줄 곳을 찾아 유랑하게 되었다.


미무스의 전통은 고대이래 장터나 축제에서 재현되었다. 미무스의 민중 배우들은 서민 생활을 바탕으로 공연을 지속했다. 그들의 출신은 서민이라서 민중들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으며, 쉽게 융화할 수 있었다. 그들의 공연은 공연장에서 벌어지는 비극보다 훨씬 수용자층과 가까웠고, 생명력도 더 길었다. 궁정에서 저녁 향연에 광대들의 공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미무스 전통이 궁정까지 침투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존재는 궁정의 쇠퇴와 더불어 궁정시인의 몰락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음유시인이 중세 내내 변화를 거듭하며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음유시인과 경쟁할 수 있는 집단은 많았다. 궁정 시인은 궁정에 기거하면서 왕을 위해서 노래를 만들어 불렀고, 성직자 시인은 교회를 따라 순례하면서 노래 불렀다. 이들이 큰 충돌 없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기능상의 차이와 수용자층의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성직자 시인은 종교적 목적으로, 종교적인 시를 써서 낭송하였다. 물론 종교가 정신사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가면서 성직자 시인의 수는 급감했지만, 종교적 기능은 상존했다. 궁정 시인도 성직자 시인처럼 영향력을 많이 잃어갔지만, 왕권의 건재함을 역설하는 기능을 했다.


이들과 달리 음유시인과 여러 가지 면에서 겹치는 연애 시인(트루바두르, 민네쟁어)은 기사 계급의 출현과 일치한다. 기사계급은 단지 귀족계급이 아니라 상류층과 하층계급의 경계를 터놓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하고 각 지방의 영주들 간의 세력 경쟁은 끊이지 않았고,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하는 전쟁이 잇달았다. 따라서 중세의 봉건 영주들은 자신의 영토와 신민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기사 중에는 귀족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농민 출신이 많았다. 영주로부터 봉토를 받고, 신분 상승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의 선망의 대상이 되게 했다.


트루바두르와 음유시인은 취급하는 소재도 비슷하여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트루바두르는 그 소재를 다루는 방식을 애매하고 어렵게 함으로써 차별화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트루바두르나 음유시인은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 비슷한 기능을 했을 것이다. 더 이상 남의 이야기를 읊조리는 서사시를 벗어나서 개인의 주관적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중세 공동체로 강하게 묶여있었지만, 그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지 않았고,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동안의 개인적 체험이 문학으로 승화된 것이다.


음유시인 수용자층의 요구에 음유시인이 정확하게 부응했다. 대다수의 농노는 봉건제의 신분체제와 장원경제 속박이 되어서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했다. 한 고장에 붙박여 사는 농노들에게 음유시인의 공연을 저잣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음유시인을 통해서 타지방의 소식도 들을 수 있고, 십자군 원정도 생생히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음유시인은 중세인들의 커뮤니케이션 결핍을 충족시키고, 자극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음유시의 속성


① 구술성(口述性)

음유시인은 단지 시를 짓는 문학인이 아닌 데 주목해야 한다. 음유시인은 문학과 음악을 함께 하는 종합예술인의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어야 했다. 문학이 음악과 결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구비성(口碑性) 때문이다. 음유시인의 작품은 현장에서 직접 발화되니까 일정한 리듬을 가져야 더 쉽고 재미있게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 만일 교과서를 읽듯 낭송을 하면, 아무도 관심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글이 아닌 말을 통한 문학은 형식이 경직되지 않고 자유롭다. 일정한 기본적인 줄거리는 같지만, 구술하는 개개의 시인이 지방마다, 특정한 배경지식을 활용해서 자유롭게 첨삭했을 것이다.


구술 문화는 문자 문화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문자는 시각에 의존해서 공간적이지만, 구술은 음성에 의존해서 시간적이다. 즉 음성은 한번 발화되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음성은 시각보다 직접적이고 강하지만, 사라져 버리는 휘발성이기에 기억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승되지 못하고 영원히 지워지는 것이 된다. 따라서 구술 문화는 기억을 강화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강력하고 리듬 있는 패턴이나, 반복과 대구, 두운, 요운, 각운, 상투적인 형용사, 표준화된 주제적 배경을 통해서 기억을 강화했다. 즉 기억의 필요성이 통사구문까지 결정하게 되었다.


② 음악성

문학성과 더불어 음악성을 빼놓고 음유시인을 논할 수 없다. 사실 음유시인이 개별 창작품을 만들어서 내놓았다기보다는 그것을 노래했다고 할 수 있다. 말에 의존했다는 것은 음악에 의존한다는 것과 상보적인 관계를 맺는다. 리듬과 운율에 맞춰 시를 노래하면, 오랜 유랑길에서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고, 사람들에게 더욱 흥미를 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 앞에서 공연을 전제로 하므로 일정한 재미를 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을 불러모으기도 힘들고, 내용을 적절하게 전달할 수도 없다.


③ 집단성

음유시가 특정 개인의 순수한 창작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는 중세의 종교적 집단성이 우선시 되었고, 계몽된 개인의 출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영웅 시가의 전설이나 연애 이야기는 집단의 구술 전승을 통해서 보존되었다. 그 과정에 집단이 가지고 있는 공동창작성이 개입되었다. 따라서 개인의 독창적인 특성이 개입될 여지가 그만큼 줄어들었다. 만일 개인이 특이한 내용이나 문구를 만들어 삽입시킨다고 하더라도 집단의 성격에 맞지 않으면 사라지기 쉬웠다. 개인의 특수성은 집단의 보편성으로 편입되어버렸다. 그 내용은 자연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원형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구술성의 경우도 비슷한 이유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 원형의 보존에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음유시인의 성장과 쇠퇴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음유시인이 출현한 것은 모순되는 면도 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봉건제가 확립되면서 지방민은 자신의 태어난 고향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봉건영주의 지배가 강화되면서, 농노들을 자기 뜻대로 부리면서, 자신들은 사냥을 하거나, 전쟁을 일으켰다. 피지배층은 귀족의 사유물로 영지에 속하게 되면서 갈등이 점점 커졌다. 사회가 폐쇄적으로 변할수록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그 해소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갈등을 풀어주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음유시인이다. 궁정시인이나 성직자 시인은 명예나 종교적 목적에 봉사했지만, 음유시인은 피지배계층의 불만을 상징적으로 해소하거나, 현실적인 해소를 촉진하였다. 현재의 위치에서 할 수 없었던 음유시를 통해서 대리만족할 수 있었다. 폐쇄적인 생활이 가져온 불안을 다소 환상적인 음유시를 통해서 해소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장원 밖의 세계에 대한 환상은 음유시가 채워줄 수 있었다.


음유시인의 존재 자체가 중세의 봉건제에 유지나 파괴에 촉진한 측면이 있다. 자유롭게 여러 영지를 오가는 그들은 한 영지에 속한 농노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음유시인의 정처 없는 삶을 부러워해서 실제로 그들을 따라나서는 무리도 있었다. 그 반대로 영지에 계속 머무르면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음유시와 음유시인을 보면서 가라앉힐 수도 있었다. 중세가 폐쇄적인 정치, 경제체제를 유지했지만, 유랑하는 무리가 많았던 것은 이율배반적인 결과였다. 한 지역에 갇히면, 그곳을 벗어나려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리고 유랑의 무리가 늘어나면 그들이 가져오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고향을 돌려보내는 법령도 제정하게 되었다. 적정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 음유시인의 유랑을 어느 정도 허용해 주었다.


하지만 중세 말기가 될수록 유랑민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유랑문학의 전성기에 음유시인 번성하는 것은 당연하다. 폐쇄적인 세계의 농노들은 음유시인을 통해서 집단으로 길들었다. 공통된 사상이 중세시대에 쉽게 퍼질 수 있었던 것도 음유시인들이 일익을 담당했다.


음유시인의 몰락은 음유시가 새로운 시대정신과 맞지 않았다는 것과 음유시의 미학이 의미를 잃었다는 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탄생과 인쇄술의 발명이 음유시인층을 무너뜨리는 기능을 했다. 중세의 집단적이고 종교적인 세계관은 시민계급의 등장과 개인의 탄생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신보다는 인간, 집단보다는 개인이 중시되면서 집단창작인 음유시는 시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시민계급은 교육을 통해서 글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개인적 독서를 통해서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된다. 여기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되어서 책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대중 앞에서 음유시인이 낭송할 필요가 없어졌다.


서구의 음유시인과 한국의 음유시인


다른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태어난 음유시인을 같은 관점에서 비교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음유시인이라는 형태가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음유시인은 보편적인 정서를 가질 수 있고 그 역할의 특수성을 논할 수 있다. 서구의 중세와 가장 비슷한 시기로 뽑을 수 있는 것은 고려 시대일 것이다. 서구 중세의 영주에 비교할 수 있는 우리의 세력은 신라말, 고려 초의 지방호족일 것이다. 하지만 고려 시대는 서구 중세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기사계급도 없었고, 폐쇄적인 장원도 없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고려와 서구 중세는 지방 중심으로 문화가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서구의 음유시에 해당하는 것이 고려속요일 것이다. 조선 시대에 남아있는 고려속요는 미미하다. 그나마 남아있더라도 조선의 시각으로 변형된 형태로 채록되어 있다. ‘남녀상열지사’라는 성리학적 시각으로 고려속요를 비하한다. 조선은 고려와 다르게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꿈꾸었기 때문에 지방문화에 대한 공격을 통해 중앙의 문화를 이룩하려고 했다. 아쉽게도 이러한 시각이 주도적이어서 고려가요가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 동동, 이상곡, 쌍화점 등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민중의 삶의 편린이었다. 고려속요의 창작자에 대해서 정리된 견해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당시의 창작관습에 미루어보아 구술적이고, 집단적이었을 것이다. 독립된 고려의 문자가 없어서 한자를 사용했지만, 피지배계급은 한자에 관해 잘 몰라서 주체적으로 채록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채록되었다. 왕조의 교체가 이뤄지고, 불교가 쇠퇴하고 유교가 흥성하고, 중앙집권체제가 도래하는 사회적 변화를 통해서 고려속요가 서서히 사라졌을 것이다.


오늘날의 음유시인


우리는 시 낭송을 점점 듣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라디오에서 DJ가 가끔 시를 들려주는 것을 빼면, 중세의 음유시인의 모습 비슷한 것도 찾기 어렵다. 그나마 재래시장도 시끌벅적한 모습이 사라지고, 깨끗하게 단장한 백화점으로 바뀌어 간다. 음유시인 계급도 사라지고, 그들이 공연할 공간이나 여건도 없어졌다. 음유시인이 유행하던 중세에 비해서 현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다. 폐쇄적인 장원에 묶어서 살아야 하는 억압이 사라졌고, 신분제도 없어졌다. 현대는 세계화를 통해서 전 세계가 연결되는 최첨단 교류의 장이 펼쳐진다. 중세에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은 벽인 신분제, 연고지, 종교적 권위가 사라지고 경계가 해체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대는 자본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계가 설정되는 블록화가 진행 중이다. 세계로 여행이 자유롭지만, 그것도 자본을 많이 가진 자에 한할 뿐이다. 교류가 활발해졌지만, 각 지역의 문화적 차이나 언어적 차이는 극복하기 쉽지 않다. 즉 세계화라는 통합을 향한 움직임과 그것에 저항하는 지역화가 동시에 진행된다. 중세와 현대의 모습은 세부사항은 많이 달라졌지만, 비슷한 점도 많다. 중세는 경제적으로 장원을 중심으로 개별 영주가 지배하였지만, 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로 통합되어 있었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독립 영지는 종교적인 종속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현대는 정치적, 군사적인 독립 국가는 자본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어졌다. 각종 다국적 기업이 여러 나라에 진출하여 통합을 주도하고 있다.


음유시인이 몰락해서 한때는 다른 문학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현대에 다시 그 위상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예전의 음유시인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지만, 우리는 음유시인을 미디어의 무대에서 볼 수 있다. 프랑스 샹송의 기원을 음유시인에게서 찾는 시도들이 있다. 대중음악은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며, 위안을 주거나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준다. 록이나 힙합의 사회 저항적인 메시지를 듣고 감동하고, 따라 부르는 세대가 나타났다. 미디어의 도움으로 대중가수들은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불러모을 필요가 없어졌다. 잘 제작된 뮤직비디오나 음반이 대신 돌아다니면서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음유시인과 오늘날의 음유시인이 다른 점은 구어적 형태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문어적 형태, 시각적 형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것이 창작의 폭을 넓힐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상투적인 형식에 더 얽매이게 만들 수도 있다. 요컨대 음유시인의 전통은 한 시대에 흥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중세뿐 아니라 다른 시대에도 역할과 비중을 달리하면서 면면히 이어왔다. 오늘날의 음유시인도 그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새 시대에 맞춰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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