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는 예보는 어김없었다. 새벽부터 내리던 빗줄기는 오전까지 이어졌고, 잿빛 하늘 아래 풍경은 제빛을 잃은 채 엷게 바래 있었다. 이런 날 창밖을 바라보다 보면 마음도 함께 내려앉는다. 흐린 날에는 기압과 습도의 변화 때문인지 몸이 무겁고, 이유 모를 외로움과 불안이 스며든다. 세상의 온도가 낮아진 듯, 마음의 불빛 또한 식어간다.
내려간 기분을 달래려 아내와 외식하고, 산책하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겼다. 아침부터 노곤함과 무력감이 밀려왔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몸속의 기운이 조금씩 깨어났다. 카페의 온기와 커피 향이 몸을 덮고, 마음은 느슨하게 풀려갔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의 휴식 뒤, 자연스레 달릴 채비를 했다. 산책이 이미 준비운동이 되어 있었고, 잠깐의 쉼이 몸을 산뜻하게 만들어 발걸음이 저절로 문밖으로 향했다.
비가 그친 하늘 아래, 한 시간 코스의 달리기가 시작됐다. 지난주 내내 달린 덕분일까. 출발부터 일정한 페이스를 쉽게 찾았다. 공기는 쌀쌀했지만, 반팔과 반바지 차림의 몸엔 오히려 날렵한 기운이 돌았다. 바람은 서늘했으나, 달릴수록 몸은 뜨거워졌다. 예전엔 출발할 때마다 힘이 잔뜩 들어가 묵직했지만, 오늘은 처음부터 부드럽게 속도를 유지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쌓인 감각이 띄엄띄엄 달릴 때마다 부딪혔던 ‘출발의 벽’을 메워준 듯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처음부터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한때는 속도에 집착하며 꾸준히 달리곤 했지만, 달리기를 꾸준히 하지 못할 때는 조심스러워졌다. 그제야 속도보다 꾸준한 리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의 변화를 의식하며, 다치지 않기 위해, 무리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달리는 법을 익혔다.
달리기가 어느 궤도에 오르자, 숨이 고르고 생각이 열린다. 발끝이 대지를 딛는 감각은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고, 그 리듬이 내 안의 번민과 불안을 밀어낸다. 달리다 보면 몸이 앞서고 마음이 뒤따르다가, 어느 순간 둘이 하나로 맞물린다. 그때부터 달리기는 내면의 혼돈을 정리하는 사색의 시간이 된다.
‘멈추지 않는다’는 의지가 나를 앞으로 이끈다. 비에 젖은 길 위에서 멈춰 선 마음을 다시 걷게 하기 위해 나는 달린다. 속도를 높이지 않아도, 목표가 없어도 괜찮다. 그저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내 안의 리듬에 귀 기울이며 달릴 뿐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 앞서거나 뒤서며 균형을 찾아가는 일 - 그것이 삶의 방식이자, 달리기의 철학이 아닐까 되뇌어진다.
비 갠 후 돌아오는 길,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마음은 한결 밝았다. 젖은 공기 속으로 들이마신 숨은 내 안의 탁함을 씻어냈고, 땀으로 흘러나간 피로는 바람결에 사라졌다. 길가의 물웅덩이에 비친 회색 하늘을 바라본다. 우울했던 하루의 무기력한 시간도, 결국은 흘러가는 비처럼 잠시 머물 뿐 오래 남지 않는다.
비 갠 후 달리며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는 동안 내 안의 침묵이 걷히고, 생기가 되살아났다. “비가 지나가면 하늘은 다시 맑아지듯, 비 갠 후 달리다 내 안의 하늘 또한 그렇게 맑아지리라.” 비 갠 뒤의 달리기 속에서 나는 새삼 깨닫는다. 지나가는 비처럼, 무거움 또한 결국은 흘러가는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