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달리면서
잿빛 물든 세상 위로
장대비 한 줄기, 세차게 내리고
비 갠 오후, 은빛으로 젖은 동네
세상은 다시
희미한 제 모습을 비춰낸다
서늘한 바람이
식어버린 열기 사이로 스며든다
가을의 기운,
성큼 다가와
창 너머, 나를 부른다
현관을 나서는 나를 향해
아내는 말없이 눈길을 건네고
지긋한 눈빛으로
조용히 웃으며 속삭인다
“무리하지 말고, 뛰지 말아요”
나는 아내를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마음을 담아 답한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달리고 올게요”
비에 씻긴 풍경
맑은 하늘 아래
한 걸음, 또 한 걸음
조용한 생각들이
발끝을 따라온다
머무는 시선마다
풍경에 마음을 얹고
차분히 흩어진
기억 위에
조심스레 발을 디딘다
나는, 천천히 달린다
아무런 흐름 없이
무엇하나 짚지 않고
홀연히 창공에 기대어
풍경 속에 나를 맡긴 채
시간과 공간은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나를 맞이하고
길 위의 나는
정해진 리듬 속으로 나아간다
움직임 속에서
나는 길 위에 있고
하늘과 대지 가운데
길은 나를
예정된 순간으로 이끈다
얽히고설킨 일상의 실타래,
크고 작은 마음의 매듭들이
고요히 다가왔다
바람결에
하나둘 흩어진다
은빛 하늘,
빛 바랜 들녘,
선선히 스쳐 가는 바람이
묶인 마음을
가만히 풀어낸다
젖은 몸을 말려줄
따뜻한 온기를 그린다
아내가 기다리는 집,
그곳은 언제나
안식의 쉼터
늘 그래왔듯
아내는 나를 기다려 주었다
내 부족함을 감싸 안고
길 위에서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주었다
가을의 문턱,
선선한 바람 사이로
나는 오늘도 천천히 달린다
그리고 추억 속에서
다시금 깨닫는다
사랑이란
돌봄이란
기다림이란 이름으로
묵묵히 곁에 있어 준
한 사람의 깊이를
비 갠 오후,
맑고 서늘한 바람이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어느새, 조용히,
활짝 열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