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서울로 향하는 버스는 늘 비슷한 얼굴들로 채워졌다. 말없이 같은 시간에 오르고, 같은 자리 근처에 앉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두 여학생이 있었다. 교복 차림의 그들은 내가 내리는 정거장 바로 앞에서 늘 함께 내렸다.
어느 날, 책을 읽다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두 학생이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버스는 이미 그들이 내려야 할 정류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다가가 조심스럽게 깨웠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일어나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안도의 웃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오래전의 내가 떠올랐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도시의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집을 떠났다. 기숙사 생활은 낯설었고, 모든 것이 버거웠다. 입학 후 처음 치른 시험은 더 큰 충격이었다. 문제는 낯설었고, 성적은 처참했다. 중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막막했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나에게, 같은 방을 쓰던 형이 물었다. 시험을 잘 봤냐고. 나는 짧게 “못 봤어요”라고 답했다. 형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책상으로 나를 불러 앉혔다.
그는 영어 단어장과 노트를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나는 이렇게 했어.” 단어를 하나씩 노트에 옮겨 적으며 외우는 방법이었다. 설명은 짧았지만, 그날의 나는 그 방법에 매달렸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책상 앞에 앉았다. 단어를 옮겨 적고 또 적었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어느 순간 단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 변화는 나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공부는 단번에 나아지지 않았다. 대신, 조금씩 쌓였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뒤에도 교실에 남았고, 기숙사 도서관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 읽으라는 책은 없었지만, 읽을 수 있는 책은 다 읽었다. 교과서와 참고서, 몇 권의 문제집이 전부였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선택한 방식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적은 조금씩 올라갔다. 눈에 띄게 빠른 변화는 아니었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대학 시험을 보러 가기 전날, 담임선생님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시험이 어렵게 느껴지면, 다 같이 어려운 거다.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
그 말은 시험 당일,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영어와 국어는 무난했지만, 수학은 첫 문제부터 막혔다. 한 문제에 몇 분씩이 걸렸다. 두 번째 문제는 손도 대지 못했다.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그런데 그때, 교실에서 몇몇 학생들이 먼저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흔들렸다. 나만 못 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때,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다시 문제지를 들여다봤다. 풀 수 있는 문제부터 다시 풀고, 모르는 문제에도 끝까지 매달렸다. 결국 시험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시험은 전체적으로 매우 어려웠다고 했다. 그날 끝까지 버틴 시간이, 결과를 바꿨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한 번의 실패로 무너지지 않는 법,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사람의 일에는 때가 있다.” 그 말은 지나고 나서야 의미가 또렷해졌다. 그 시절은,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버스에서 만난 두 학생은 아마도 또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피곤에 지쳐 잠들었지만, 다시 깨어 학교로 향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나는 예전의 나를 본다.
그 시절의 나는 서툴렀고, 부족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시간은, 결국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