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개체

by 전우 호떡

손님이 방문해 대화를 나누다가 문득 책상 위에 놓인 만년필에 관심을 가지면서 펜에 새겨 있는 영문 이니셜을 보고는 무슨 펜이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그에게 펜을 보여주면서 만년필에 관한 사연을 전했다. 만년필은 정들었던 전우가 야전 근무를 마치고 부대를 떠나면서 나에게 주고 간 선물이었고, 그와 나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만년필에 내 영문 이름을 넣어주어서 그런지 절대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자산 목록 1호로 늘 가지고 다니면서 집과 사무실, 어디서나 함께하고 있다.

1년여 동안 함께 근무했던 전우를 떠나보내는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는 따뜻한 성품을 가졌고, 항상 여유 있고 차분하게 매사에 임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좋아했고, 나도 그와 함께하면서 좋은 추억이 많이 남았다. 내가 그의 나이였을 때를 돌아보면서 “나는 그처럼 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며 그의 겸손한 태도와 탄탄한 내공에 감탄하게 되었다. 가까웠던 전우를 보내고 공허한 마음을 누르며 일상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를 보내고 야외 현장에 다녀왔는데, 사무실 책상 위에 종이가방이 놓여 있었다. 가방 안에 메모지와 함께 포장한 선물이 들어 있었다. “글 쓰실 때 이 만년필을 통해 좋은 글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문인회란 이름으로 서로가 쓴 글을 맨 먼저 읽어보고 소감과 함께 의견을 교환했고, 이런 과정의 추억이 담긴 내가 쓴 글을 엮어 수필집을 그에게 주었었다. 그는 나에게 글 쓰는 데 도움이 되라는 뜻에서 만년필을 선물해 주었다. 특별히 만년필에 나의 영문 이름이 새겨 있는 걸 보고는 사전에 계획했음을 알았다. 작별의 순간을 앞두고 오랜 시간 동안 준비한 선물을 보면서 괜한 수고를 끼쳤다는 생각에 나는 더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이런 선물을 전우에게 받아 본 적이 거의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내게 요긴한 품목을 골랐기에 참으로 나의 역사에 남을 뜻깊은 선물이었다. 만년필을 꺼낼 때마다 그를 떠올리게 된다. 한 번은 회식 자리에서 열기가 뜨거워진 가운데 그는 나에게 쌈을 싸주었다. 나는 아내가 주는 쌈도 약간 거북해 먹지 않는 형편이라 차마 먹을 수 없어 웃으면서 사양했었다. 그는 더 크게 웃으며 내민 두 손에 쌈을 수직으로 그대로 올려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성의를 거절했기에 미안했지만, 나의 사양을 미소로 받아주어 우리는 한바탕 함께 웃었다.

그와 함께하며 부정의 표현은 내게 다시 돌아옴을 자각하며, 부정적인 마음을 내려놓기 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그는 단아한 태도로 늘 수더분하게 낙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부정의 언어를 쓰지 않았다. 함부로 말하지 않고, 감정이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조용한 어조를 유지하며 말을 삼갔다. 그의 태도를 어깨너머로 보면서, 나는 지금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기억은, 그는 휴가를 다녀오면 으레 빵이나 간식류를 가져와 부서원들과 오순도순 둘러앉았고, 나도 자주 그 대열에 합류했었다. 사람들이 그의 주위를 자주 오가며 함께 했던 이유는 물질의 공유에서라기보다는 당시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타인을 위한 좀 더 깊은 배려에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영어에 일가견이 있었다. 영어 점수도 높았지만, 실용적으로 원문을 독해하면서 책을 읽는 능력이 탁월했다. 독서토론회에서 그는 영어로 된 400쪽에 달하는 벽돌 책을 읽고 소화하여 쉽게 내용을 정리하고 소감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에게 영어 공부를 함께 하자고 제의했지만, 한 번도 실행에 미치지는 못했다. 영어에 관한 한 그의 실력과 노력을 부러워하면서 그는 나에게 따라가야 할 본보기가 되어 주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필기구를 좋아했다. 용돈을 받으면 거의 매일이다시피 볼펜을 사곤 했었다. 그 유전자가 첫째에게도 이어져 첫째도 필기구를 아주 좋아하고, 필기구 사는 게 취미일 정도로 즐기는 편이다. 그와 함께 한 짧은 기간 그가 어떻게 나의 기호를 알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호의를 갖고 서로 통하는 느낌으로써 관심사에 대해서도 알게 모르게 파악되지 않았나 짐작한다. 나에게 성의 있는 태도로 일관했던 그에게 감사한다.

만년필로 쓰는 모습이 멋져 보였지만, 볼펜에서 만년필로 갈아타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선물로 만년필을 몇 번 받았는데, 별로 사용하지 않다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애용하게 되었다. 만년필이 부드럽게 미끄러지듯이 생각이 슬슬 잘 나오고 글도 잘 써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가 선물한 만년필은 잉크를 다 쓰면 채우는 충전식으로 되어 있어 잉크 필터를 자주 갈아 끼우지 않아도 되기에 편리하다. 만년필 자체가 잉크통으로 통째로 잉크를 채워 쓰는 타입으로 평생 쓰게 될 것 같다.

즐겁고 행복한 과거는 오늘과 내일의 성장과 연결된 과정이다. 그와 관련된 태도, 배려, 간식, 영어 등의 주제어를 중심으로 추억을 그려보니 인연으로 비롯된 행복감과 풍요로움이 배가 되었다. 취미가 다 그렇겠지만 함께 해야 무엇이든 보태지는데, 그가 선물한 만년필이 나의 소소한 취미인 글쓰기에 동행하고 있어 재미와 의미가 더해지고 있다. 내가 쓰는 글이 나만의 세상을 만들지만, 그와 매개체가 되는 만년필로 쓰는 글은 함께하는 세상을 이루고 있다. 글을 쓰면서 그를 향한 마음이 애틋해지는 까닭에 그는 나에게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2024년 5월 대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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