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갯속에서 한 걸음씩

by 전우 호떡

이사를 준비하며 수년간 벽장 속에 잠들어 있던 상자들을 꺼냈다. 종이와 문서로 가득한 상자를 하나하나 정리하다가 문득, 러시아에서 석사과정을 보내던 시절의 강의록이 손에 잡혔다. 빛바랜 노트 사이로 스며 있는 그 시절의 기억은 어렵고 막막했지만, 동시에 잊을 수 없이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학사과정에서 인문학을 전공했던 나는, 한 단계 성장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공계 석사과정을 선택했다. 수학과 물리에 약한 나에게 그 결정은 어쩌면 인생을 건 모험이었다.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채 러시아 땅을 밟았지만, 막상 입학하자 두려움은 현실이 되어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파고들었고, 결국 전공 변경을 위해 학부의 문을 수차례 두드렸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매번 ‘불가’였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비로소 받아들였다. “이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


그 이후로는 오직 버티는 시간이었다. 수업 시작 전에 가장 먼저 도착해 빈 강의실에 앉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한 줄도 놓칠까 두려워 노트에 모조리 옮겨 적었다. 모르는 문제는 친구들에게 끈질기게 부탁해 설명을 들었고, 때로는 그들의 기숙사 방에 앉아 문제 하나를 풀 때까지 나오지 않았다. 부끄러움도, 자존심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단지 ‘해내야 한다’는 절박함 하나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첫 번째 시험과 마지막 논문심사다. 첫 시험은 다행히 통과했지만 과정은 험난했다. 교수님 앞에서 문제 풀이를 설명해야 했는데, 질문의 의도조차 이해하지 못해 얼어붙었던 순간, 교수님은 그림과 도표를 그리며 다시 차근차근 질문을 풀어주셨다. 그날의 나는 안갯속을 걷는 듯 막막했지만,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커다란 짐을 내려놓은 듯 후련했다.


논문심사를 앞두고 지도교수님은 자필로 백 개에 달하는 문제를 직접 풀어주시며 한 달 동안 도와주셨다. 때로는 점심을, 때로는 늦은 저녁까지 챙겨주시며 하루에 두세 문제씩 설명해 주셨다. 그 노트는 나중에 교수님마저 복사해 가신 귀한 자료가 되었고, 나는 그만큼 큰 배움을 안고 심사 준비에 임했다. 심사 전날, 교수님의 칠판 강의는 살벌할 만큼 진지했고, 그 속에서 나는 마침내 논문 심사 합격을 위해 단련되고 있었다.


드디어 찾아온 심사 당일. 잠을 설친 탓에 눈은 퀭했지만, 내 안의 결심은 더 단단했다. 많은 교수님들 앞에서 발표를 시작했지만, 질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곤란에 빠졌을 때마다 동료 학생과 지도교수님이 번역해 주고 설명해 주었다. “답을 못하면 끝이다”라는 절박함 속에서도, 결국 그들의 도움 덕분에 나는 긴장된 공격을 무사히 방어할 수 있었다. 심사장을 채운 박수와 사회 교수님의 따뜻한 칭찬은 그간의 고통을 한순간에 녹여 주었다.


심사를 마친 후, 도움을 준 학생들에게 인사하던 중 한 친구가 “재미있고 논리적이었다”며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 말 한마디에 긴장이 풀렸고, 우리는 한참 동안을 함께 웃었다. 아내는 그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으로 남겼다. 지금도 힘든 시기가 찾아오면 그 영상을 보며 다시 용기를 얻곤 한다.


돌아보면, 그 학위는 단순히 ‘공부를 해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방인을 따뜻하게 가르쳐 준 교수님, 어려운 부탁에 기꺼이 손 내밀어 준 학우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나 자신이 함께 만든 결과였다. 만약 불확실한 미래만 걱정하며 발을 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걱정은 대부분 ‘근본’을 잃은 데에서 비롯된다. 내가 선택한 길이 완벽하지 않았을지라도, 그 선택의 출발점은 나였고, 결국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야 했다. 비껴갈 수 없었기에 앞으로 나아갔고, 물러설 수 없었기에 현재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생의 도전은 늘 두렵다. 하지만 돌아보면, 가장 두려웠던 순간들이 가장 큰 성장을 남겼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봉우리를 향해 한 걸음씩 올라가듯, 나는 그 시절 의지의 끈을 다시 조이고 성실의 신발끈을 단단히 묶었다. 그렇게 걸어 오른 시간이 내 삶의 단단한 거름이 되었고, 그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미소가 번진다.


2023년 11월 양주에서

'밑거름'에서 다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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