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을 가득 채우던 시간

by 유혜빈


방학이 되면 나는 늘 외갓집으로 향했다.

아이 셋을 키우느라 바쁜 엄마는,

하나라도 외갓집에 보내야 숨통이 트인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외갓집에서 유난히 잘 지냈다.

심심하단 말 한마디 없이 한참을 있다 오곤 했으니까.


외갓집은 늘 북적였다.

함께 살던 삼촌과 이모뿐 아니라,

근처에 사는 친척 이모들도 틈만 나면 놀러 왔다.

마당 있는 집에 살 때나,

나중에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 뒤에도

집 안 가득 북적이는 풍경만은 늘 같았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이 컸고, 인심은 더 넉넉했다.


음식은 늘 풍성했고,

자리가 모자라면 방석 하나 더 펴면 그만이었다.

삼촌과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놀다 보면

이모가 만화책을 한가득 빌려왔다.

취향에 맞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같이 웃고 읽고 노는 그 시간이 좋았다.


부엌에선 늘 무언가 끓고 있었고,

할머니는 한 번도 쉬시는 법이 없었다.

삶은 고구마, 찐 옥수수, 간장 비빔국수,

달큰한 식혜까지.

무언가를 먹고 있으면 어느새 또 다른 음식이 나왔고

배부르다 한마디 하면,

잘 익은 과일이 가득 담긴 그릇을 내오셨다.


친척들이 모이는 날이면

우리는 다 함께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큰 다라이에 만두소를 넉넉히 준비해 주시면

가족들은 옹기종기 앉아 반죽을 펴고

소를 넣고 정성껏 빚었다.


어린 나는 삐뚤빼뚤한 만두를 만들었지만

할머니는 꼭 그 만두를 찾아내 내 그릇에 담아주셨다.

“이거 네가 만든 거네.

아이고, 아주 예쁘게 잘 만들었네.”

그 말 한마디면 입안의 만두가 유난히 더 맛있었다.


겨울이 오기 전, 김장철이 돌아오면

온친척들이 총출동해

마당이 발 디딜 틈 없이 붉게 물들었다.

커다란 고무대야에 소금에 절인 배추가 층층이 쌓이고,

이모들은 고춧가루와 다진 마늘, 생강,

젓갈을 잔뜩 풀어 양념을 버무렸다.

할머니는 무채를 썰고, 외삼촌들은 배추를 나르고,

우리는 김치소를 배추 잎 사이사이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손가락에 양념을 살짝 찍어 맛보면

짭짤하고 칼칼한 그 맛에 눈이 반짝였다.

들킬까 봐 두리번거리면서도 자꾸 손이 갔다.


고소한 젓갈 냄새와 매운 고춧가루가 뒤섞여

코끝이 얼얼하고 눈이 시큰해질 무렵

할아버지가 수육을 삶기 시작하셨다.

가마솥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윤기 자르르 흐르는 고기가

보들보들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이제 됐다, 수육 먹자!”

이모의 한마디에 모두가 손을 멈추고 평상으로 모였다.

따끈한 수육 한 점 위에

갓 담근 아삭한 김치를 얹어 한입에 넣으면—

모든 수고가 그 한입에 스르르 녹았다.

말보다 웃음이 먼저 터졌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맛을 나눴다.


김치를 다 담고 나면, 어른들은 항아리를 덮고,

우리는 김치와 밥 한 그릇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마당에 어둠이 내려앉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리 하나씩 쭉 뻗는다.
몸은 천근만근인데, 마음은 어쩐지 가볍고 든든했다.


그 많던 사람들도,

김장날의 북적임도,

이제는 기억 속 풍경이 되었지만—

그때 배운 손맛은, 여전히 내 손안에 남아 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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