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끝에 남은 편지

by 유혜빈


“할머니~ 다녀오겠습니다!”

“할머니~ 우리 갔다 올게요.”


“그려… 그려… 걱정 말고 재미있게 잘 놀고 와!”


부모님과 우리 세 자매는 여름휴가를 떠났고,

할머니는 홀로 집을 지키셨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의 외출은

늘 여섯 식구가 함께였다.

휴가, 가족여행, 외식, 공휴일…

그리고 특별한 날이면 늘 할머니까지 동행하셨다.


하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었다.

외갓집 식구들과의 모임이나

부모님 친구 가족들과의 여행처럼

함께 할 수 없는 날들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할머니도 친구들과 만나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밖의 외출보단

집에 계시는 걸 좋아하셨다.

우리가 북적이던 집은,

그 순간부터 조용히 할머니의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는 혼자 쓰는 방이 있으셨고,

그 안엔 작은 TV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경말씀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셨다.


늘 방에만 계시던 할머니가

우리가 외출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항상 거실에 나와계셨다.


현관문을 열면,

할머니는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아

무언가를 수첩에 적고 계셨다.


“다녀왔습니다~ 할머니, 우리 왔어.”

“할머니, 지금 뭐 해? 일기 써요?

우리가 물으면,

할머니는 늘 퉁명스럽게 말씀하셨다.

”유언장이다 “


괜찮다고 하셨지만,

혼자 계신 시간이 많이도 서운하셨던 걸까…

농담처럼 들리지만,

웃음기 없는 할머니의 표정은 진지해 보였다.


그때 할머니의 나이는

고작 예순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어린 나는 ’ 유언장‘이라는

그 말에 한 마디에 덜컥 겁이 났다.

’ 할머니가 곧 우리 곁을 떠나실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다.


나는 할머니 옆에서 자면서

새벽이면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할머니가 숨을 쉬고 계신지 확인하려고

코 앞에 손가락을 대보곤 했다.


그리고 매일 밤 기도했다.

아침에 내가 눈을 떴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채로 누워 계시지 않게 해 달라고…

죽음이 무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곁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두려웠다.


그 시절, 할머니가 쓰시던 ‘유언장’의 내용은

전혀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저 할머니가 사라질까 두려웠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도,

할머니는 여전히 유언장을 쓰고 계셨다.

할머니에게는 작고 낡은 수첩들이 여러 권 있었는데,

그 안이 성경 말씀으로 가득한 건지,

정말로 유언장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아흔을 바라보던 어느 해,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

유품은 아빠 혼자 정리하셨다.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우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의 남겨진 물건들은…

아까워서 어떻게 쓰냐며 고이고이 모아뒀을

손녀들이 사다 드린 화장품과 선물들..

할머니가 평생 기도로 채우셨을 성경말씀 공책,

성경책 그리고 찬송가…

그리고 유언장이라 불렀던

오랜 세월의 흔적이 묻은 수첩들이 있었을 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안엔 오직 하나뿐인 아들을 향한

이야기들이 빼곡히 담겨 있진 않았을까?

혹시 아빠는 그 수첩들을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함부로 꺼내 보여주기엔 너무 소중했고,

너무 오래 품었던 마음이 사라질까 봐…


그 수첩은

사실 ‘유언장‘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던

엄마가 아들에게 쓴 긴긴 세월을 따라 써 내려간,

아들을 향한 편지였을 것이다.


아빠는 아마 그 편지를,

혼자 조용히 읽고 또 읽으셨을 것이다.

딸들에게도, 아내에게도 보여줄 필요 없이…


나는 이제,

그 수첩을

‘유언장‘이 아니라

아들에게 써온 마지막 편지라고 기억하려 한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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