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소녀야, 고마워

by 유혜빈


“할머니, 그땐 어땠어요?”


나는 가끔 묻곤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다가,

작은 미소와 함께 아주 오래된 시간을 꺼내놓으셨다.

조용한 목소리로 들려주시던 그 이야기들은

마치 먼 길을 건너오는 것 같았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지나

세상의 거센 변화를 온몸으로 견뎌낸 시간들.

할머니는 그야말로 역사의 한복판을 살아낸 분이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 속엔

그토록 험했던 시대의 고통이 아닌,

햇살 아래 반짝이던

꿈이 가득한 소녀의 시간들이었다.


“그땐 내가 학교도 다니고, 책도 참 좋아했어.”

“엄마 손잡고 장날 가는 길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러.”


할머니는 오래된 보물함을 여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고도 애틋하게 그 시절을 꺼내 보여주셨다.


나는 늘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에이~ 할머니, 완전 거짓말~”


그러면 할머니는 더 크게 웃으며 덧붙이셨다.

“아니여~ 사람들이 나 보면

얼마나 곱고 이쁘다 했는디~”


그땐 정말 믿기 어려웠다.

초등학생이던 내게, 할머니는

그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으니까.

주름진 손, 느린 걸음, 따뜻한 이불 냄새 같은 존재.

예쁜 치마를 입고 웃던 소녀라니,

아무리 들어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느 날, 할머니는 오래된 앨범을 꺼내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한 장 한 장 들춰 보여주셨다.

흑백 사진 속, 단정한 머리와 곱게 치마를 입은 소녀.

바로 할머니였다.

나는 사진을 뚫어지게 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할머니, 난 지금의 할머니가 더 좋아.

이 사진, 뭔가 이상해. 할머니 아닌 거 같아.”


그 말에 할머니는 웃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셨다.

마치 그 안에 묻혀 있는 시간을 더듬듯,

지금은 사라진 누군가의 목소리와 손길을 떠올리듯.


할머니의 아무 말 없이 오래 바라보던
그 눈빛 속엔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보다 한때 빛나던 시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에게 그 사진들은

그 어떤 보물보다 값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흑백의 추억이 아니라, 살아 있었던 시간,

사랑받았던 날들의 흔적이었으니까.


할머니가 꺼내 보이던 그 말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따뜻한 기억의 조각들이었는지…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할머니의 눈동자에

얼마나 고운 빛이 스며들어 있었는지도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문득문득, 나는 그 시절을 상상해 본다.

햇살이 살며시 내려앉은 한옥 마당.

바람에 치맛자락이 살랑이고,

고무신 한 켤레가 마루 끝에 나란히 놓여 있다.

댕기로 단정히 묶은 머릿결이 흔들리고,

작은 손엔 꽃이 수놓아진 손수건이 꼭 쥐어져 있다.


그 속에는, 누구보다 귀하고 사랑스러웠던 소녀…

바로 할머니다.


나는 상상 속에서 그 소녀 곁으로 천천히 다가가

손을 잡는다. 함께 웃고, 달리고,

꽃이 만발한 들판을 끝없이 뛰어다닌다.


그리고 나는 그 소녀에게 조용히 말한다.


“예쁜 소녀야, 나와 함께 놀아줘서 고마워.

네가 외롭지 않도록,

그 따뜻했던 마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내가 언제나 너와 함께해 줄게.”


그 소녀는 조용히 웃는다.

햇살이 손수건 끝에 부드럽게 내려앉고,

바람이 치마 끝을 가만히 흔든다.

그 웃음은 마치 오래된 사진 속 한 장면처럼

내 마음속에 고요히 머문다.


할머니는 정말, 그렇게 예쁜 소녀였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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