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어, 참 다행이야.

by 유혜빈


할머니의 치매는

시간이 갈수록 조금씩 더 깊어지셨다.

우리 얼굴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셨지만,

며칠 전 일은 잊고,

같은 질문을 반복하시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병이라기보다는,

시간이 조금씩 기억을 덮어가는 것 같았다.

엄마는 그런 변화를 보며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야 할 때야.”


잊는 것이 많아진 만큼, 마음에 오래 남을 기억을

더 많이 심어드리고 싶다고 했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SNS가 활발했다면

조금은 수월했을 텐데…

엄마는 오래된 전화번호 수첩을 들고

하나씩 전화를 돌리며,

구청에 찾아가고, 기억나는 동네를 직접 찾아다녔다.


그렇게 수소문 끝에

할머니가 보고 싶어 하시던 친척들과 친구분들을

하나둘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의 기억은 흐려지고 있었지만,

그 시절의 사람들 앞에선

잃어버린 이야기들이 놀라울 만큼 또렷하게 돌아왔다.


“아이고야, 네가 벌써 저 나이가 됐다고?

그럼 내가 몇이야 대체….”


“아이고, 어쩜 하나도 안 변했어.

아직도 그 눈웃음이 그대로네.

그땐 우리도 참 예뻤지.”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눈물을 닦으셨다.


“그래, 나 기억난다.

언니가 우리 밥 해준다고 맨날 집에 불렀잖아.

그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그 자리는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잊혔던 이름들이, 다시 목소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중에서도

할머니가 가장 보고 싶어 하시던 분은

그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던 ‘미국 할머니’였다.


이미 오래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지만,

엄마와 이모가 어렵게 연락을 했고,

마침내 캐나다에 사는 이모의 집에서

두 분이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모네 집 마당 앞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현관문 앞에 선 미국 할머니를 보고

한참을 멈춰 서 계셨다.


“맞지? 맞지? 시간이 그렇게 지났어도 그대로야.

아이고, 참말로… 살았구먼, 살았어.”


미국 할머니도 할머니를 보자마자 울컥하셨다.


“아이고, 니가 여기까지 와줬구나.

살아서 이렇게 다시 보네, 우리가…”


두 분은 말없이 서로를 꼭 안았다.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숨 고르듯 웃고, 울고,

주름진 손등을 매만지셨다.

아무 말도 필요 없는 시간이었다.


미국 할머니는

엄마와 이모를 보자 활짝 웃으며 말씀하셨다.


“아이고야, 니네는 하나도 안 변했네.

내가 이 애들 며느리감으로 딱 찍었었는데,

아이고 아깝다 아깝다.”


“예전에 내가 우리집 아들놈들이랑

그 집에 들러서 밥 해 먹고 갔었잖아.”


“그랬지,그랬어! 우리집 호박들어간 김치,

그게 그렇게 맛있다고 왔지!

근데 이젠 어떻게 하는지도 다 잊었어, 기억도 안나.”


그 한마디에 모두가 조용히 웃었다.

서운함보다도 따뜻한 마음이 먼저였다.


그렇게 대화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누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손주들은 다 컸는지, 누구랑 누구 닮았는지…

수십 년이 흐른 이야기들이 햇살처럼 퍼져나갔다.


그해 여름, 두 분의 목소리와 웃음은

캐나다의 시간 속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두 분을 모시고 여행을 다녔다.

카페에 가고, 벤치에 앉아 쉬고,

사진을 찍어드리고, 저녁이면 함께 드라마를 봤다.

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할머니가 두 분이나 계신 것 같아서

나는 마음이 든든했고,

두 분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영감님이 어디가 좋아서 그 피난통에 쫓아 내려왔어?”

“난 하나도 생각 안 난다. 하나도 생각 안 나.”


할머니는 크게 웃으며 대답을 슬쩍 피해 가셨다.


“그땐 생각나?

우리 관광버스 타고 온천여행 다녔자나.”

“같이 갔던 이들, 죽었나 살았나 모르겠네…”


그 여름, 할머니의 추억 여행은

매일 밤 나도 함께 빠져들게 했다.


익숙한 듯 낯선 이야기들,

지워지지 않은 풍경들 속에서

우리는 하루하루를 참 따뜻하게 보냈다.


누구에게나

그리움이 되는 얼굴이 하나쯤은 있다.

기억은 때로 사라지지만,

마음에 남은 사람은 잊히지 않는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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