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할머니는 조용한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예전보다 훨씬 작은 집이었다.
평생을 누군가와 함께 지내셨던 분이기에
혼자 지내시는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우리가 간다고 하면
할머니는 늘 밥상을 준비하고 계셨다.
된장에 지진 총각무가
보글보글 끓는 냄비 속에서 푹 익고 있었다.
“어, 왔냐. 뭐 그렇게 많이 들고 왔어.”
“할머니, 심심하실까 봐요. 이거 간식이에요.”
우리는 과자 봉지와 과일, 약과 같은 간식들을
냉장고 위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난 안 심심해. 낮에 TV 봤다 자고 나면 저녁 되더라.”
진짜 그랬는지,
그 말에 외로움이 섞여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더 자주 찾아갔고,
늘 혼자 먹기엔 많을 만큼 간식을 들고 갔다.
“할머니, 이거 노인정 친구들이랑 나눠 드세요.”
대학생이었던 나는 시험이 끝나거나 방학이 되면
짐을 챙겨 며칠씩 할머니 집에 머물렀다.
“할머니, 나 왔어요.”
“오느라 힘들었지? 밥부터 먹자.”
방은 좁았지만 이상하게 편했다.
이불은 항상 외갓집 냄새가 배어 있었고,
할머니의 요리는 대충대충 하시는 듯해도
언제나 깊은 맛이 났다.
나와 동생은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날이면
십 원짜리를 복주머니에 한가득 준비해 갔다.
“할머니! 고스톱 많이 쳐야 치매 예방에 좋테요.”
“그래, 쳐야지. 이리 갖고와.”
화투는 자개장 서랍에 늘 정해진 자리에 있었다.
“오늘은 내가 오광, 고도리 다 먹는다!“
“에이, 또 광박 당하겠다.”
“대박. 쓰리고에 흔들어!”
화투짝을 내고, 동전을 주고받으며
웃고, 놀라고, 성내고, 또 웃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
할머니는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고,
가벼운 치매 진단도 받으셨다.
우리 가족은 마음 한구석이 늘 불안했다.
웃고 있는 얼굴 뒤로
가끔은 잊어버린 눈빛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래서 더 자주 찾았고, 더 오래 머물렀다.
그런데 고스톱을 칠 때만큼은
할머니는 예전처럼 또렷하고 생기 있어 보이셨다.
게임이 끝나면
”오늘은 내가 샀다~” 하며
모은 동전으로 치킨을 시켜 나눠 먹었다.
누가 이기든,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할머니, 집 앞에 예쁜 카페가 생겼어요.
커피 마시러 가요!”
“그래, 가자, 가자.”
할머니는 달고 진한 믹스커피를 좋아하셨다.
우리는 메뉴판을 들여다보다
제일 달콤해 보이는 걸 골랐고,
시럽을 두 번, 연유도 한 스푼 더 넣었다.
“할머니, 어때요? 간이 좀 맞아요?”
“맛없다.”
역시 할머니에겐
믹스커피만큼 맛있는 커피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할머니의 미용실 담당이기도 했다.
“짧고, 강하게, 빠글빠글하게 해 주세요.”
“오늘은 좀 덜 빠글 하게 해 볼까요?”
“아냐, 빠글 해야 오래간다.”
할머니의 주문은 늘 똑같았다.
펌이 강해야 오래간다며, 거울을 보며 활짝 웃으셨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거울 앞에 앉혀드리면
할머니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확인하셨다.
“아이고, 이쁘다 이쁘네.”
주위에서는
“요즘 애들이 안 그러는데…”
“손녀딸들이 참 착하네. 할머니 복 있으세요.”
하며 칭찬했지만,
사실 나는 착해서가 아니라
그냥… 할머니랑 있으면 마음이 놓였고,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따뜻한 밥 냄새, 켜놓은 TV 소리,
무심하게 챙겨주는 말투까지.
그게 나한텐 가장 편한 풍경이었다.
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내게도 힘이 되었고, 편안했고,
그냥… 따뜻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온기,
서로의 곁이 되어준 시간.
할머니와 함께한 그 날들 덕분에
나는 오늘도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