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냉면 한 그릇

by 유혜빈


누구에게나 마지막 밥상은 있다.
그날이 언제였는지,
무슨 음식이었는지는 달라도,
사랑하는 이와 나눈 그 한 끼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할아버지가 병원에서 퇴원하시던 날,

엄마는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태워드렸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백미러 너머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수척해진 얼굴, 바짝 마른 입술,

말없이 창밖을 보는 눈동자.


“아빠, 집에 바로 갈까? 아니면… 냉면이나 드실래요?”

엄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려

작게 웃으며 말하셨다.

“냉면… 좋지.”


목소리는 작고 힘이 없었지만,

그 한마디는 오래된 그리움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근처의 평양냉면집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햇살이 쏟아졌고,

점심시간이 지나 식당은 조용했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자리에 앉자 물김치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잠시 후, 차가운 육수 위에 고기와 배가 얹힌

물냉면이 나왔다.


할아버지는 젓가락을 들어 면발을 천천히 저으셨다.

한 젓가락을 드시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엄마는 가위로 할아버지의 냉면을 잘게 자르며 말했다.

“이제 먹기 편해졌겠다.”

할아버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할아버지는 조금씩, 아주 천천히

면을 입에 넣고 꼭꼭 씹으셨다.

몇 번 젓가락을 들고, 다시 내려놓고,

수저로 육수를 한 모금 떠 드셨다.

그리고는 식탁 너머 어딘가를 말없이 바라보셨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나도

모두 말없이 국물 소리와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들으며 그 식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는 끝내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고,

가만히 수저를 내려놓으셨다.

그리고는 숨을 고르듯 잠시 눈을 감으셨다.


“할아버지~ 맛있게 드셨어요?”

내가 물었다.


“맛은 있네.”

짧은 말이었지만, 만족스러우신 듯했다.

엄마는 수건으로 입가를 닦아드리며 작게 말했다.

“잘 드셨어요”


그날,

그게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식사였다.

냉면 한 그릇.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식사였지만,

그 장면은 내 기억 속에

정지된 사진처럼 오래도록 남아 있다.


냉면의 차가운 육수,

삶은 계란 반쪽,

잘게 잘린 면발,

그리고 젓가락을 쥔 가늘어진 손.


며칠 후,

할아버지는 집에서 조용히 잠든 채 세상을 떠나셨다.

그날의 냉면은,

생의 마지막 맛이 되었다.


그건 단지 냉면 한 그릇이 아니었다.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채 그저 곁에 있던,

너무나 소중한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스무 살의 내가 처음 마주한 이별,

아직 칠순도 되지 않으셨던

나의 외할아버지.


내가 뭘 하든

“그래, 잘했어”

“우리 손녀 최고야”

언제나 그렇게 웃어주시던 분.


누구보다 내 이야기를 자랑스러워하셨고,

조건 없이 내 편이 되어주셨던 분.


할아버지는 이북 사투리를 쓰셨다.

어릴 적엔 무슨 말인지 몰라

“이모, 통역 좀 해줘!” 하며 웃곤 했지만,

이제는 그 말투 하나하나가

따뜻한 기억처럼 떠오른다.


요즘도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이북 사투리가 들리면

TV속 장면보다 먼저

할아버지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그 말투는,

그 자체로 나에게 사랑이었다.


할아버지와 시장에 함께 나가면

“이거 사줄까?”

“저건 어때?”

“뭐 먹고 싶니?”

지나가는 곳마다 그렇게 물으셨다.


나는 넘치도록 사랑받고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늘 더 주고 싶어 하셨다.

그게 사랑이었다.

아무 조건도, 이유도 없는.


그리고 지금도,

가끔 문득—


그 말투가,

그 냉면 한 그릇이,

그날의 할아버지가

자꾸 생각난다.


내 그릇에 조용히 반찬을 얹어주시던 손,

어딜 가든 “우리 손녀가 말이야…” 하며

자랑하던 그 목소리,


그 모든 기억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이번엔 내가 냉면을 대접하고 싶다.


“할아버지, 오늘은 제가 사는 거예요.”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마주 앉아 오래 이야기 나누고 싶다.


면이 불어도 괜찮다.

말없이 있어도 괜찮다.

그저, 곁에 계시기만 하면 된다.


그 한 자리에.

냉면 한 그릇 사이로.

다시.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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