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를수록 할머니의 기억은 희미해져만 갔다.
우리 얼굴은 여전히 알아보시면서도,
며칠 전 일은 금세 잊으시곤 했다.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날들이
조금씩 늘어갔다.
그 모습은 병이라기보다는
시간이 천천히 기억을 덮어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낯선 이름보다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가운 듯 웃으셨고,
지금보다 오래전 그 시절의 풍경은
더 생생하게 떠올리셨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은 할머니를 자주 만났다.
할머니는 증손주들에게도 사랑을 아낌없이 주셨고,
아이들 역시 “왕할머니”라 부르며 곧잘 따랐다.
가끔은 손자들 이름을 헷갈리셨지만,
손을 꼭 잡고 웃어주실 때면
그 따뜻한 마음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
할머니는 평소처럼 산책하러 나간다며 집을 나서셨다,
그런데 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셨다.
전화도 받지 않으셨고,
우리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밤늦게서야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큰일은 없었지만,
어디에 다녀오셨냐는 물음에
할머니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 동생은 할머니의 핸드폰에
위치 추적 기능을 설정해 두었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일이 또 벌어졌다.
우리는 스마트폰 지도에 떠 있는 파란 점을 따라
골목길을 헤맸다.
그 끝엔 오래전 할머니가 사셨던 동네,
늘 다니시던 사우나가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간판, 낮은 돌계단,
손님이 드문 오래된 목욕탕.
할머니는 하루 종일 그곳에 머무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익숙한 구석진 자리에 앉아 계셨다.
몸이 먼저 기억해 낸 장소.
머리가 잊어도, 마음이 그리워한 풍경.
그곳이, 할머니 기억 속에 가장 따뜻하게 남아 있던
‘집 같은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할머니의 건강은 눈에 띄게 쇠약해지셨고,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한 번 무너진 건강은 회복되기보다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의사 선생님은 조용히 우리를 불러 말씀하셨다.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그 말은 가슴속에 잔잔한 파문처럼 번졌다.
누구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고,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먼저 울지 않으려 애썼다.
엄마와 나, 동생은 매일 병실을 찾았다.
기억을 더듬듯, 손을 꼭 잡고
할머니 곁에 가만히 앉았다.
할머니는 더 이상 우리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면 오래도록 바라보셨다.
“할머니… 우리 얘기 들려요?”
“할머니, 보고 싶어서 우리 또 왔어요.”
나는 천천히 귀에 대고 살며시 속삭였다.
할머니는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셨다.
눈을 꼭 맞추고, 말없이.
그 눈빛엔 그동안의 모든 시간이 담겨 있었다.
더는 떠오르지 않는 단어들 대신,
아직 남아 있는 마음으로.
이름도, 날짜도, 어제의 대화도 잊은 채
과거의 시간 속에 홀로 머물던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매일이 낯설고 헷갈리고 두려웠을까.
아니면 복잡한 걱정도,
말 못 할 외로움도, 슬픔도 다 잊은 채
그저 편안하셨을까.
그날의 대화는 모두 잊었지만
어린 시절과 젊은 날의 추억은
그토록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걸 보면…
그 시절 속에 살아가는 하루는
지금 이 시간보다
오히려 더 따뜻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머니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만큼은 바랐다.
그 마음 하나로
나는 오늘도
그날의 할머니를 오래도록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