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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희수 Feb 15. 2019

내 짧고 가벼운 달리기 역사

장거리를 달리고 싶은 단거리 주자

   사계절 내내 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밖으로 나가 달린다. 거리는 대략 5에서 6킬로미터. 집 앞에서 망원 한강 공원, 난지 한강 공원이 들어오는 반경이다. 그 반경 내에서 기분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코스를 바꿔 가며, 그야말로 가볍게, 달리기 위해서 달린다.

   언제 달리기를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십 년 전 즈음부터는 조금씩이라도 달리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때그때 생활 패턴에 따라 규칙적이 될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중 가장 치열하게 달린 시기는 오륙 년 전 그러니까 2013년, 2014년 경이었다. 나는 마라톤, 즉 장거리 달리기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일요일 제외하고 주 6일, 하루 최소 6킬로미터에서 최대 10킬로미터를 달렸다. 어떤 날은 양화대교 아래까지, 어떤 날은 상수 나들목까지. 그리고 토요일에는 비정기적으로 20킬로미터를 달렸다. 성산동에서 원효대교를 찍고 돌아오는 코스다. 강 건너편으로 노르스름한 63 빌딩이 반짝이고, 영화 <괴물>에서 고아성이 갇혀 있던 괴물의 은신처 부근이 반환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무식하게도 달렸던 것 같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달렸음에도 특별히 몸에 이상을 느낀 적은 없었다. 물론 하반신 곳곳에 당김과 쑤심은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몸의 반응일 뿐이었다. 일상(당시에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한참 공연도 다닐 때였다)을 소화하는 데 무리는 전혀 없었다. 피로감도 그다지 심하게 느끼지 않았고, 잠도 어느 때보다 깊이 들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평소처럼 양화대교를 찍고 돌아오는 길에 왼쪽 종아리에 슬며시 통증이 왔다. 누군가 끝이 뭉툭한 쇳덩이 같은 걸로 종아리 가운데를 꾹꾹 찔러 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부위는 서서히 뜨거워졌다. 물론 걱정스러웠지만,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라는 생각에 아마 이틀 정도 휴식을 취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니나 다를까 통증은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다시 달리기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아리가 찢어질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왼발을 땅에 디디는 것조차 힘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튿날 곧장 병원에 갔다. 나는 의사에게 종아리가 찢어질 듯이 아프다고 말했고, 곧 실로 명쾌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럴 만도 하네요. 실제로 근육이 찢어졌어요”

   옳거니. 찢어질 듯이 아팠던 게 아니었다. 찢어져서 아팠던 것이었다. 이제야 말이 된다. 이어 의사는 향후 몇 개월 같은 종아리에 무리가 갈 만한 활동은 삼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략 몇 개월이나 걸릴까요? 그건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환자분의 회복력에 달려있겠죠. 그러나 통증이 사라졌다고 해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으니 최소 육 개월 정도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생각해보니 꽤나 친절한 의사였다.

   그 후로 약 십 개월 동안은 달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아쉬운 마음은 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몸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신호를 보내왔으니 그에 따를 수밖에.

   한 동안은 내가 왜 다쳤는지,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달리며 음악을 듣기 위해 왼팔에 찼던 암밴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 양쪽 다리 길이가 많이 다른가(실제로 재어보았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도 아니면 언젠가는 마땅히 일어나야 했던 일이었을까.

   어쨌거나 덕분에 하루가 한두 시간 정도 늘어났고, 나는 곧 그런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작업 시간도 좀 늘리고, 미뤄둔 책이나 영화, 다큐멘터리도 챙겨보며 늘어난 시간을 나름 알차게 채워갔다. 사실 통증은 얼마 안가 사라졌지만, 의사의 충고대로 시간을 충분히 두었다. 가능한 한 말끔하게 나았으면 했다. 다시 달리고 싶었기 때문에 달리지 않았던 셈이다.

   그렇게 한해를 넘기고 날씨가 따뜻해질 무렵, 마침내 나는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고, 얼마간은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미심쩍었던 암밴드는 벗어버렸고(정확하게는 웨이스트 밴드로 교체), 짧은 거리부터 다시 서서히 페이스를 올려갔다. 그러나 몇 주도 채 되지 않아 정확히 같은 부위에 같은 통증이 재발했다. 통증을 느낀 순간 나는 매우 상심했다. 다시 예전처럼 뛰지 못하게 될 거라는 불안감과 나 자신의 경솔함에 자괴감을 느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물론 짝발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낮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의혹과 추측의 날들이 다시 시작됐다. 나는 기타를 치던 중에도, 책을 읽던 중에도,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에도, 생 파스타 면을 반죽하던 중에도 생각했다. 매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있는 다리를 건널 때마다, 그 아래, 한강 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초록색과 빨간색 길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생각했다. 나는 왜 다쳤을까. 아니, 왜 다쳐야만 했을까. 나는 다시 마음 편히 달릴 수 있을까.

   일 년 후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나는 더 이상 거리나 페이스를 늘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느긋하게 기분 좋을 정도로만 달리며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만 집중했다.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이고 어떻게 힘을 나누어 받아내는지 유심히 느끼려 애썼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다행히 그 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내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나는 어쩌면 장거리 주자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타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체형만 놓고 본다면 확실히 그래 보인다(마라톤보다는 이종격투기 쪽).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달리기 메커니즘에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이 그렇게 계속 이어진다.

   올해 나의 첫 달리기는 1월 중순에 시작되었다.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을 때였지만, 대신 준비 운동을 대폭 늘리고 평소보다 더 느긋하게 달려보자고 마음먹었다. 지금까지는 아주 좋다. 몸의 균형이 점차 좋아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 무엇보다 마음이 매우 가볍다. 삶의 난제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놓여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테지만, 달리는 순간만은 가벼워질 수 있다. 나는 분명 언젠가 장거리 주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또는 현생으로서는—무리일지도 모르고, 설령 되지 못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다. 그런 건 이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졌다.

   숨이 서서히 차오르고, 눈 앞에서 공기가 부드럽게 갈라진다. 발 밑으로 길이 쏟아지고 또 멀어진다.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긴 거리든, 짧은 거리든, 빠르든, 느리든 그 일은 언제나 똑같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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