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만능 건강식
올 초, 요리 책을 한 권 읽었다. 요리 전문가가 아닌 저자가 일상적으로 해먹는 요리를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 쓴 가벼운 책이었다. 하나 비전문가라 해도 책 한 권을 써낼 정도이니 그 다양함과 디테일함은 이미 나같은 일반의 수준을 넘기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내가 일상에서 가볍게 시도해볼 만한 요리가 별로 없었다는 얘기다. 그러고 보면 그게 언제나 요리 책이 가진 문제다. 어째 나도 모르게 백종원의 대중적 성공 비결을 역설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아무튼, 그럼에도 그 책에서 한 가지는 제대로 건졌다. 바로 야채스프다. 해당 부분을 읽자마자 ‘아, 이건 나도 손쉽게 시도해볼 수 있겠다’ 싶어 시험삼아 만들어봤더니 맛은 물론이고, 쓰임새가 무궁무진하여 그 이후로 가장 자주 해먹는 요리가 되었다.
지금까지 내 경험으로 볼 때, 이 야채스프에서 가장 중요한 재료는 병아리콩과 감자 그리고 마늘이다. 거기에 당근, 샐러리, 호박, 케일, 버섯, 두부 등등이 그때그때 기분과 사정에 따라 추가되거나 생략된다.
조리법은 사실 ‘조리법’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간단하다. 손질한 재료들은 적당한 크기로 썬 다음, 역시 적당량의 물과 함께 큼지막한 냄비에 때려넣은 뒤 30분에서 40분 정도 푹 끓여내면 끝. 간은 소금과 후추로 충분하다. 다만 병아리콩은 유사시 총알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딱딱하니 조리하기 한두 시간 전 미리 물에 불려두는 게 좋다. 조금 딱딱한 식감으로 먹고 싶다면 한 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그처럼 과정은 대충대충이지만, 완성된 야채스프는 꽤 근사한 모습이다. 물론 맛 또한 외양에 밀리지 않는다. 더없이 간단한 만큼 웬만해서는 실패하기 어려운 요리다.
야채스프는 냄비가 식고나면 냉장고로 직행하기 때문에, 아직 뜨겁고 재료들이 생생할 때 한 국자 가득 그릇에 덜어내 선 채로 후루룩 먹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가장 먼저 입으로 가져가는 건 역시 병아리콩. 몇 단계에 걸쳐 오도독하고 부서지는 기분 좋은 식감과 고소한 맛이 일품이다. 물론 다른 야채들도 맛있지만 나는 사실 병아리콩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마음이 든다.
그렇게 냄비째 냉장고 아랫칸을 점거한 아채스프는 한동안 내 식생활의 베이스캠프가 된다. 매일 그것만 먹으면 지겨울 것 같아도 활용법에 따라 그 표정이 무척이나 다양해지기에 항상 같은 걸 먹고 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는 조금 덜어내 살짝 데워 아침 식빵에 적셔먹기도 하고, 라면에 한 국자 슬쩍 끼얹기도 하고, 고기나 어묵을 쎃어넣고 좀 더 끓인 뒤 고춧가루를 뿌려 밥에 말아먹기도 하고, 밥 대신 칼국수 면을 넣어 야채 칼국수로 만들어 먹기도 하고, 그대로 카레 분말을 투하해 야채 카레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그야말로 만능 건강식인 셈이다.
뭐 나야, 딱히 건강해지기 위해라기보다는 그냥 순전히 맛있어서 먹는 거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