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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희수 Sep 10. 2020

맥주의 위기

   이건 비단 나뿐 아니라 다들 대체로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데. 맥주는 취하기보다 그 특유의 찌릿한 시원함을 목구멍으로 느끼기 위해 마시는 것이다. 물론 단지 시원함을 위해서라면 논알코올 맥주나 탄산음료를 마셔도 똑같지 않냐고 혹자는 물을지 모른다.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맥주의 찌릿한 시원함이란 소량의 알코올만이 부릴 수 있는 가볍되 너무 가볍지는 않은 무게감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뭐랄까. 잘 훈련된 소수정예 알코올들이 목구멍으로 대충대충 넘어가려는 탄산을 붙잡고 몇 차례 더 지그시 밟아준다고 할까. 비유가 다소 거칠기는 하나 아무튼 마시는 입장에서는 그 느낌이 더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때로는 고맙다고 절이라도 올리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애석하게도 몇 년 전, 뜬소문 정도로만 여겼던 ‘맥주의 위기’가 내게도 찾아오고야 말았다. ‘위기’라고 거창하게 쓰기는 했다만 사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간단히 말하면 그냥 맥주가 예전만큼 맛이 없어졌다는 얘기다. 한때는 맥주라면 몇 시간이고 맛있게 벌컥벌컥 잘만 마셨는데, 언젠가부터 한 모금 마셔보고는 ‘아, 이게 아닌데’ 하는 일이 잦아졌다. 종류의 문제인가 싶어 여러 종을 시험해봤으나 아쉽게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그 와중에도 어째서인지 기네스는 그나마 마실만 했다). 그렇게 서서히 맥주 양이 줄더니 급기야 작은 캔 절반도 기분 좋게 비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몇 안 되는 삶의 즐거움 중 하나가 그렇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현상이—즉 ‘맥주의 위기’가—찾아온 이유에 대한 개인적인 가설은 ‘실제로 몸이 변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나도 이제 결코 적은 나이라 할 수 없다 보니, 자연히 몸도 그동안 부분별 하게(사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분출시켜온 호르몬과 기름의 양을 대폭 하향 조정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맥주의 맛에 그대로 반영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 물론 여기에는 어떠한 과학적, 합리적 근거도 없다.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가설 내지는 정제된 망상일 뿐이다. 이런 망상(까짓 것 그냥 망상이라 부르기로 하자)을 여전히 멈출 수 없는 걸 보면, 몸과 달리 정신 쪽은 어째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기뻐할 일인지 딱하게 여겨야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그건 그렇고. 당연한 얘기겠으나 맥주 없이도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삶이란 (물론 얼마간 정성을 들인다고 가정했을 때) 꽤나 유연한 것이라 사라지는 게 있으면 또 그만큼 생겨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무엇이 생겨났는지는 솔직히 말해 ‘맥주에 들였을 돈이 절약되었다’는 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지만, 분명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더 생겨났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있다. 이렇게 또 하나의 망상이 목록에 추가된다.


   그런데 몇 개월 전,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후 러닝을 마치고 마트에서 어슬렁어슬렁 장을 보던 중 불현듯 ‘맛있는 알코올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이 찾아왔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주류 코너를 찾아 과감히 여섯 캔 들이 맥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질곡의 세월을 이겨내고 다시 한번 맥주의 시간이 찾아오는가’하는 기대감을 안고 한 모금 마셔보았는데, 서글프게도 내가 상상하던 맛이 전혀 아니었다. ‘맥주의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하나 그 뒤로도 ‘맛있는 알코올을 마시고 싶다!’는 충동만은 좀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 매번 마트를 들를 때마다 주류 코너를 기웃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별로 장려할 만한 모습은 아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아예 주종을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어, 우선 적당한 가격대의 화이트 와인을 한 병 구입해 마셔보았다. 썩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맥주 쪽보다는 마실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몸 저 안 쪽에서부터 쭈욱 하고 빨아들이는 듯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최근 상당히 재미있게 읽고 있는 소설의 한 구절을 빌려오자면, 그건 마치 빈털터리의 돈을 훔친 것 같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평화와 안정을 찾은 곳은 '위스키'라는, 적어도 내게는 새로운 성역이었다. 다소 높아 보이는 가격대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이전까지 나는 위스키라는 술에 어쩐지 권위적이고 점잔을 빼는 듯한—지금 돌이켜보면 꽤나 삐뚤어진—인상을 갖고 있던 터라 주류 코너를 둘러볼 때도 그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데, 처지가 처지이다 보니 결국 거기까지 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 일. 그동안 내 몸이 간절히 바라 온 것이 정확히 거기에 있었다. 나는 위스키의 그 짧고 짙은 충만함 그리고 그 뒤에 남는 깨끗한 아쉬움에 즉시 빠져버렸다. 한 번에 조금씩 마시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가격에 있어서도 맥주 쪽보다 싸게 치였다. 그렇게 저녁 식사의 꿈틀거림이 얼마간 잦아든 뒤, 혼자서 조촐하게 따라 마시는 위스키는 이제 내 일상의 가장 확실한 행복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신기한 건 위스키에 맛을 들이고 나자 어찌 된 일인지 맥주와 와인도 이전보다 훨씬 맛있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 셋을 항시 넉넉하게 구비해두고 그때그때 기분과 상태에 따라 요리조리 골라 마시고 있다. 요컨대 ‘맥주의 위기’가 ‘위스키의 도래’로 허무하게 막을 내리게 된 셈이다. 과연, 새로운 가치의 등장이야말로 기존 가치에 새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건 아닐까, 라고 또 혼자 조용히 망상해본다. 홀짝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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