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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희수 Dec 05. 2018

와사비의 습격

와사비 시식 설문 조사에 응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대체로 설문 조사들을 거절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물론 보드와 볼펜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이나 설문지만 보면 비협조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유 없이 마구 솟구치는 정도는 아니지만, 대개 설문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본 후에 너무 긴 시간이다 싶으면 거절하는 편인데 다만 내 기준에서 그 긴 시간이 아주 짧을 뿐이다. 대놓고 비협조적인 것은 아니지만 분명 협조적인 인간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며칠 전 나는 지인의 일본인 친구를 통해 와사비에 대한 시식 설문 조사를 부탁받았다. 일본인 친구가 다니는 회사에서 최근 한국 시장에 와사비 제품 출시를 계획 중인데, 그를 위해 한국인을 대상으로 시식 설문 조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리 밝혀두자면 나는 와사비를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다. 그리고 설문 조사에 대한 입장 역시 앞서 충분히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일본 회사, 와사비, 설문 조사라는 말들은 이국에 대한 나의 편견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나는 어느새 두꺼운 브라운관 모니터 앞에 바른 자세로 앉아 설문지를 높게 쌓아두고 기계식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일본인 개발부 사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고, 특별히 추가적인 질문도 없이 설문 조사에 응하겠다고 말했다. 이틀 후 나는 지인을 통해 시식용 와사비와 설문지, 그리고 사은품—고형 카레와 각종 소스 등—이 담긴 쇼핑백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시식용 와사비는 총 여섯 가지였다. 그중 세 가지는 국내 회사의 제품이었고, 나머지 세 가지는 설문 조사를 의뢰한 한 일본 회사의 제품들이었다. ‘바쁘신 와중에 시식 설문 조사에 협조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설문지는 예상대로 빽빽하고 질문들도 하나같이 구체적이어서 나는 굳이 바쁜 와중이 아니더라도 그 설문지로 인해 바빠질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것들이 담긴 쇼핑백을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 세워두고 화장실을 오갈 때마다 노려보며 가장 적당한 때를 노렸다. 

   사실 설문지 말고도 시식을 바로 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대체 와사비를 무엇에 곁들여 먹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와사비를 시식하기 위해 뜬금없이 연어나 회를 준비하기에도 좀 부자연스럽고, 그냥 와사비만 시식하기에는 너무 매울 듯하니까. 가능한 평소 먹던 음식과 함께 시식하는 것이 이 설문 조사의 의도와도 부합할 거라 생각했다(이럴 때는 불필요할 정도로 협조적이다). 어쨌든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메뉴는 삼겹살 구이였다. 그래서 나는 일요일 저녁 식사로 된장찌개를 끓이고 삼겹살을 구웠다. 그리고 며칠간 쇼핑백 안에 고이 잠들어있던 와사비들을 꺼내 설문지에서 정해둔 샘플 순서대로 접시에 정성스럽게 일렬로 조금씩 짰다. 와사비의 색감 차이를 잘 보기 위해 하얀 접시를 사용했음은 물론이다. 다만 패키지들과 설문지를 싱크에 그대로 놓아두는 바람에 시식은 불가피하게 블라인드로 진행되었다. 


샘플은 왼쪽부터 A, B, C, D, E, F 순이었다.


   샘플은 왼쪽부터 A, B, C, D, E, F 순이었다. 나는 먼저 A부터 맛보았다. 색감은 어디서나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어두운 청록색을 띠고 있었다. 삼겹살 한 조각에 살짝 묻혀 입 안에 넣은 뒤 천천히 씹자 아주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누구라도 체감적으로 그것이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은 알 수 있을, 와사비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맛이었다. 동시에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맛이기도 했지만. 다음은 B 차례, 색감은 절인 그린 올리브 색에 가까웠다. 먹어보니 앞서 맛본 A가 그냥 와사비 흉내만 낸 것에 불과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다채로운 맛이 났다. 첫 순간은 미세하게 달았지만 중간에는 와사비 특유의 맵삭함이 있었고 마지막에는 고소함과 약간의 쓴 맛을 남겼다. 이것이 과연 프로 와사비의 세계구나, 싶을 정도로 나는 큰 맛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밥과 된장찌개로 입을 헹궈낸 후, 곧장 C로 넘어갔다. 색감은 전체 와사비 중 가장 밝고 선명한 라임색을 띠고 있었다. 이거 꽤나 재미있어지는데,라고 생각하며 삼겹살과 함께 C를 씹자마자 나는 입 안과 코에서 강렬한 고통을 느꼈고 그로부터 약 3분 간은 시식이 불가능해졌다. 그 고통이 지속되는 동안 나는 어째서인지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브라운관 모니터를 가리키며 깔깔거리는 모습이 떠올랐다. 스고쿠 오모시로이네. 그 여파에서 간신히 벗어난 직후, 나는 와사비가 혹시 샘플 순서대로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을 잠깐 품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다스리고 조심스럽게 다음 와사비로 넘어갔다. 걱정과는 달리 D는 과하지도 않고 적당하게 여러 가지 맛을 내고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B와 비슷한 느낌이었고 색감 역시 그랬다. E는 단 맛이 너무 강해서 다른 맛들을 모두 해치는 느낌이 들었다기보다 사실 단 맛밖에 나지 않았다. 마지막 F는 색감이 가장 옅었는데(사실 그래서 왠지 더 무서웠다) 와사비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고소했다. 이건 미국인들을 타깃으로 한 와사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흥미로운 식사를 마친 후에 나는 싱크에 놓아둔 패키지들과 설문지를 확인했다. A, D, E는 국내 회사의 제품들이었고, B와 나를 죽일 뻔한 C 그리고 마지막 F는 설문을 의뢰한 일본 회사의 제품들이었다. 나는 식기 도구들을 정리한 후 가능한 솔직하게 느낀 대로 설문지를 작성했다. C의 매운 정도를 묻는 문항을 제외하고는 ‘아주 그렇다’는 항목을 선택할 일이 거의 없었다. 어쨌든 최종적으로 내가 설문지에 담은 내용을 정리하자면 대강 이런 것이었다. 

   「B와 D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나머지는 별로였습니다. C는 제가 아주 보기 좋게 속았습니다. 위험할 뻔했어요. 그리고 만약 와사비 가격이 3,600원 이상이라면 저는 절대 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귀사의 패키지 디자인이 이미 훌륭하니 제발 디자인을 한국식으로 바꾸지 말아 주십시오.」

   설문지 작성도 일종의 자기표현이다.

   나는 브라운관 모니터 앞에 앉은 일본인들이 내 설문지 속에서 그 말을 꼭 발견해주기를 은근히 바라며 설문지를 스캐너에 넣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를 도무지 설명하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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