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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희수 Jul 29. 2021

<퀸즈 갬빗>과 <위대한 승부>

승부와 성장


   1

   작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 중 가장 즐겁게 본 작품은 <퀸즈 갬빗>이었다. 1950년대 말 미국의 한 소녀가 천재적인 체스 선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이 미니시리즈는 뛰어난 각본과 연출, 연기뿐 아니라 당대 패션지를 펼쳐놓은 듯 다채로운 의상, 풍부한 사운드트랙 등으로 시종 눈과 귀를 만족시킨다. 시리즈물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 나도 편수가 좀 더 많았으면 하고 바랐을 정도였다.


   그리고 <위대한 승부>라는 또 하나의 체스 영화가 있다. 1993년 작이니 무려 28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다. 나는 이를 최근에야 보았는데, 보는 내내 <퀸즈 갬빗>과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로여서가 아니라 비슷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접근법이 사뭇 달라서다. 다시 말해, 두 작품 모두 체스 천재를 다룬 성장 영화이지만, 성장의 주체와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는 얘기다.



   2

   먼저 <퀸즈 갬빗>의 주인공 베스 하먼에 대해 얘기해보자. 극초반 그녀의 심리 상태를 가장 잘 요약하는 말은 아마도 ‘위화감’ 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 별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은 상태다. 그래서 무엇에도 쉬이 공감하지 못하며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한다. 엘리자베스 하먼에게 세상은 지루하고 시시한 곳일 뿐이다.


   이런 그녀에게 의미 있는 장소가 생겼으니 그게 바로 체스판이다.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현실과 달리 체스판 위에서는 이해 불가능한 일이 없다. 모두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여야 하고 누군가의 편의에 의해 규칙이 바뀌거나 조정되는 일도 없다. 모든 게 정연하고 수긍 가능한 형태로 고정되어 있다. 늘 원인과 결과가 맞아떨어진다. 실력이 모든 걸 대변한다. 그녀가 바라는 세상의 모습이 전부 거기에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체스로 세상과 승부해나간다. 처음에는 못마땅하고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내던 이들도 이내 그녀의 압도적인 재능에 찬사를 보낸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과 냉정함으로 상대들을 무참히 꺾어놓는다. 온갖 대회를 휩쓸며 빠르게 부와 명성을 쌓는다. 그러나 겉만 화려할 뿐 사실 그녀의 세계는 늘 좁고 폐쇄적이다. 체스판 위에서는 훨훨 날아다니지만 현실에선 연기 없인 정상적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불안은 약과 술 중독으로 이어진다. 승부에 대한 집착도 갈수록 심해진다. 이는 전부 그녀의 폐쇄성이 불러온 자기 중독으로 볼 수 있다. <퀸즈 갬빗>은 한 외톨이 천재가 끔찍한 자기 중독을 극복하며 조금씩 세상과 화해해나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위대한 승부>의 조시 웨이츠킨은 베스 하먼과 완전히 반대 극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의 주위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온전한 가족이 있고, 그 역시 가족을 사랑한다(심지어 공원의 낯선 아저씨들마저 사랑한다). 이 천사 같은 꼬마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 사랑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베스 하먼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났음에도 체스로 승부를 보려고도, 이를 통해 자신을 애써 증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행동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지는 않을지 두려워한다. 즉, 그와 세상 사이에는 이렇다 할 불화가 없다. 조시 웨이츠킨이 세상에 느끼는 주된 감정은 위화감이 아니라 친근감과 사랑이다.


   문제는 이런 그를 주위에서 가만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조시가 체스를 둘 줄 아는지도 몰랐던 아빠 프레드는 어느 날 우연히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곤 이를 통해 세상과 승부를 보려 한다. 스승인 브루스는 더하다. 그는 상대를 향한 경멸심과 자신에 대한 엄격함만이 완벽한 체스 선수를 만든다며 계속해서 조시를 몰아붙인다. 조시가 바라는 건 체스를 하든 보드 게임을 하든 낚시를 하든 그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다. 자신이 가진 재능이 그 일에 방해가 된다면 그는 얼마든지 자신의 재능을 내칠 수 있다. 대회 전날 밤 조시가 아빠에게 한 말은 이런 그의 심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실상 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다.


   “어쩌면 최고가 아닌 편이 나을지도 몰라요. 그럼 져도 괜찮잖아요.”


   이로써 <위대한 승부>는 주인공 조시가 아닌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성장 이야기가 된다.



   3

   이렇듯 <퀸즈 갬빗>과 <위대한 승부>는 다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장 이야기가 그러하듯 이 두 작품 역시 방식만 다를 뿐 똑같이 하나의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결과나 승패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과정이 중요할까. 인간은 누구나 성장 과정에 놓여있고, 그 속에 인생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실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결과에 집중할수록 우리는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게 되기 쉽다. 그러한 지나친 평가와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은 되도록 과정에 집중하는 것이다. 자신과 타인의 노력에 대한 진심 어린 존중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믿는다. 인생은 결과 도출 시스템이 아니다. 다만 자신과 세상의 진실에 부단히 다가서는 노력의 과정이다. 성장의 이야기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지만, 이는 승부의 작동 방식을 요약한 말일 뿐이다. 그 냉정함은 승부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생은 승부가 아니다. 승부는 인생의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그 어떤 승부도 누군가의 인생을 대변할 순 없다. 우리가 정말 패배하는 순간은 어떤 승부가 우리 스스로와 인생의 가치를 결정한다고 믿어버릴 때 찾아온다. 이것이 매우 비슷한 듯 다른 두 작품, 혹은 매우 비슷한 듯 다른 두 인물, 엘리자베스 하먼과 조시 웨이츠킨이 그들의 인생을 통해 내게 들려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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