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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호우 Aug 29. 2018

백수의 길 - 류호우 편

201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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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가 되면 대체로 바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백수’의 상태로 석달쯤 보내고 나면 ‘무엇이든 하는 백수’의 상태가 된다. 더러 그렇지 않은 백수들도 있는데, 그건 뭔가 기다리는 것이 있어서다. 들어올 돈이 있거나, 노리고 있는 자리가 있는 등, 기대할만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 ‘백수’, 그 자체로써 자아실현 중인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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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에서, 묘한 표정의 나.

‘뭐든 하는 백수’인 나는 엊그제와 어제, 양일 간 전석순 소설가형아를 만나 춘천에 머물다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지 6시간만에 부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베를린 박사, 오일리 형이 부탁한 부산 친구를 위한 선물 배달과 나의 오랜 친구인 타투이스트 산이를 만나기 위해서 동분남주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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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습성상, 육체적 고통으로 소비를 줄일 수 있다면 기꺼이 육체적 고통을 선택한다. 한번쯤 타고 싶었던 수서-부산 간 SRT를 과감히 포기하고 AM 06:30 출발하는 부산행 고속버스를 타기로 했다. 야탑 종합버스터미널로 향했다. 집을 나설 때, ‘뭔가 잊은 것 같다’ 는 생각이 들면 분명히 무언가 놓고 오기 마련이다. 그게 립밤이나, 현금다발이라면 괜찮다. 안 쓴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고 없으면 없는대로 가치를 보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안 그래도 1시간 밖에 못 자 피곤했는데, 1주 동안 못 잔 사람의 피곤함을 느끼게 만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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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출발 30분 전에, 베를린에서 받아온 선물 가방을 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캬.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인데 잊어버리다니. 이 과정중심주의자같은 녀석! 스스로에게 감탄하고야 말았다. 엄니께 부탁드려 택배로 부치고 버스를 탈 것이냐, 집에 들러 짐을 가지고 SRT를 탈 것이냐는 선택지를 두고 딱 십사초 동안 고민했다. 나는 다시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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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를 제대로 못 뵙고 출발했기에, 문안인사를 드리고 볼뽀뽀를 하고 나왔다. 다 큰 아들의 애교는 엄니의 주머니를 열었다. SRT를 타러 가는데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아슬아슬한게 싫어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부산 가는 동안 푹 자려고 했는데, SRT는 3시간도 안 되어 부산에 도착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빠르잖아. 강변역에 있는 동서울 터미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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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타는 플랫폼을 확인하고 터미널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한대 피웠다. 분명 멀리 있을게 분명한데 손 내밀면 닿을 것 같은 롯데타워를 보며 바람을 쐬고 있는데 포장마차의 아주(할)머니께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추억이 방울방울 열리는 분위기의 포장마차에 들어가 우동 한 그릇을 주문했다. 서른이 될 때즈음이었나, 혼자 국내여행을 했다. 제주도에서 김포로, 김포에서 서울역으로, 서울역에서 강변역으로 넘어 와, 강변역에서 강릉으로 넘어 가려고 했을 때였다. 늦은 밤 터미널에 도착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난생 처음 혼자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우동 한 그릇에 소주를 홀짝이며 스스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그 때보단 고민이 덜했다. 다행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때보다는 덜 심각하게 우동 한 그릇을 비우고 수고하시라고 할까, 많이 파시라고 할까 찰나의 시간동안 고민했다. 많이 파세요, 하고 나오는데 사장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삼촌~ 나는 삼촌이 이국적으로 생겨서 외국인인줄 알았지 뭐야~ 홍홍홍~~’ 그 말이 웃겨서 나는 그만 이상한 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아 그러세요? 허허~’ 를 생각했으나, ‘앟핳. 그러세요.’ 라고 끝을 내렸다. 사장님의 발언에 당사자인 내가 허가를 해준 느낌이었달까. 버스 출발까지 십오분이 남았다. 플랫폼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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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같은 한국인인 나는 한국인 같은 한국인들과 버스에 올랐다. 바닷가 근처에 사는 오랜 친구를 볼 생각에, 전투경찰 생활을 2년 간 했던 부산을 다시 만날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산이가 수영복을 가져오라고 했다. 마음껏 수영하자고. 어릴 때 동네 수영대회에서 금메달(도금)과 상금(문화상품권 5천원권 1장)을 탄 경력이 있는 나는 경력과 무관하게 물을 좋아한다. 물이 주는 자유로움과 동시에, 실감하는 육지동물로서의 한계가 묘한 시너지를 주기 때문이다. 태풍이 온단다. 곧 도착한단다. 파도가 최대 8m라고 한다. 호우도 온다고 한다. 나도 호우긴 하지만 그 호우는 나따위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강력한 호우님이시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니 잠이나 더 자야겠다. 사고의 두꺼비집을 잠시 내리고.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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