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과 이별 그 무기력한 공백에 관하여
"만나고 알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슬픈 이야기다."
-S.T. 콜리지-
무지개가 뜨거나 바람에 꽃잎이 날리면 작년에 하늘나라에 가신 나의 하나뿐인 할머니가 떠오른다. 맞벌이인 부모님을 대신하여 어린 나를 키워주시고 몸체 만한 캐리어를 끌고서 씩씩하게 유학길에 나서는 나를 와락 안아주곤 하셨던 나의 할머니. 작년 봄 중환자실에서 온갖 종류의 바늘을 손에 꼽고서도 내가 드린 노란 꽃 한 송이에 미소를 지으시던 할머니. 온화하고 예쁜 것들이 눈에 띄는 봄이면 특히 그녀가 돌아가시기 전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우리 손자가 예쁜 꽃을 줬으니 예쁘게 하고 나타나야겠다는 말."
좋은 모습으로 건강히 퇴원하겠다는 말이었겠지만 그녀가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내 곁을 떠났을 때에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의 감정이 마음을 아리게 했다.
갑작스레 다가온 할머니와의 이별 앞에 나는 강력한 무기력함을 느꼈다. 옆에 건강히 계실 줄로만 알았던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제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입원하시기 전까지만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었을 텐데 당시엔 코로나 때문에 중환자실에 방문하는 것조차 제한됐다. 그녀에게 작은 꽃 하나 전해줄 때에는 왜 진작 나는 그녀에게 꽃 한 송이 사드리지 못했을까라는 자책감이 느껴져 괴로웠다. 그렇게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을 때에는 정말이지 심오하고 복잡한 여러 어두운 감정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은 나열할 수 없이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이별이라는 단어는 참 지독한 감정을 불러오는 것 같다.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기에 언젠가는 내 삶 속 모든 것들과 이별하는 순간을 마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마지막까지 꼭 움켜잡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내 마음속에서 초라하다.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잃어버린다 해도 마음이 깊게 쓰리지는 않는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산 나의 소유물들이 한순간에 없어진다고 한 들, 죽을 만큼 나를 괴롭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위해서 한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간다 한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 움큼의 희망을 품어 볼 수는 있을 테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소중한 누군가와 이별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다루기 어려운 일이다. 사랑했던 누군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에게만 국한된 것들은 내 통제 하에 다시 복구할 수 있겠지만 소중한 인연과의 이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이별이기에 분노와 부정의 감정이 아닌, 그저 슬픔이라는 감정밖에는 들지 않는 것이다. 이별 앞에서 모든 자들은 깊은 슬픔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자신을 돌아보고는 이내 겸손해질 뿐이다.
이별은 정녕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이다.
이별이 아픈 큰 이유 중 하나는 후회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가족 혹은 친구와의 사별이건 연인 간의 헤어짐이던지 간에 이 세상 속 모든 이별 뒤에 우리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씩 맞는 느낌을 받는다. 이별하기 전에는 미처 그 사람과 나의 인연이 이렇게 깊고 소중한 것이었는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내 삶 속에서 이렇게나 중요한 사람이었구나,’ ‘정말이지 많은 것들을 받아왔던 내가 진정으로 행운아였구나’라는 사실은 대개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에서야 비로소 눈에 선히 보인다. ‘왜 나는 그만큼 돌려주지 못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상태가 돼버리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본래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은 본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상대를 통해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모든 유형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이별 앞에서 그나마 덜 힘든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인연을 귀히 여기고 더 많은 사랑을 주었기에 사랑을 받은 상대방보다 비교적 덤덤히 이별을 맞이할 수 있다. 반대로 받기만 한 사람은 이별 이후에 너무나도 힘들다. 상대방과 이별한 후에야 비로소 상대방에게 사랑을 주고 싶다는 강렬하지만 불가능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이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그에게 소중한 인연인 것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그 인연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인연이 유한한 것을 알지만 마치 무한한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모든 인연의 끝은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이별이라는 것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내가 할머니를 자주 뵈러 가지 않았던 이유 역시 다음을 기약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꽃을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여태껏 꽃 선물을 하지 않았던 것은 지금이 아니어도 다음이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은 자기 위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없는 지금, 이별이라는 단어의 무게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후회 말고는 더 이상 없다. 지금 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
결혼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이성을 만나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과 교제 속에서 나와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을 수 있다는 의미일 텐데 그 의도를 십분 이해하면서도 세상에 이렇게 가벼운 말이 또 있을까 싶다. 이 말의 효용성 검증을 둘째치고 인연이 그렇게 쉽게 맺고 끊어낼 수 있는 것으로 치부된다는 것이 안타깝다.
도대체 누가 당신의 연애를 위해 많은 이들의 마음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가? 연인 관계는 마음이 깊게 오가는 사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취약한 존재가 되기를 자처하는 관계 속에서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위험한 관계를 최대한 많이 번복하겠다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 따위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미로 들릴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를 가볍게 시작하거나 끝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연을 맺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시작조차 하지 마라. 시간 낭비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많은 이성들을 만나면서 자신에게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찾는 전략을 수정하고 그 시간을 아껴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는 게 자신과 맞는 사람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더 빠른 길이 될 거 같다. 안타깝게도 나를 포함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깊게 생각할 기회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조차 모르는데 자신과 맞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모든 인연의 맺음 끝에는 반드시 이별이 있다. 음과 양처럼, 인연과 이별은 필수 불가결하다. 가족의 연이던 친구의 연이던 연인의 연이던 한번 맺은 인연은 죽기 전까지 지워낼 수 없다. 인연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무의식적으로 한 번 우리의 삶에 소중한 존재로 들인 누군가는 우리의 가치관과 삶에 스며들어 나라는 인생의 일부가 된다. 이별에 초연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인연을 맺기 전에 조심 또 조심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며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 피천득 -
이별은 아프다. 진작에 알았더라면 그토록 쉽게 인연을 거슬러 누군가와 억지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별이 누군가를 내 인생에서 도려내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그 도려냄이 생각보다 오랫동안 마음에 멍을 지게 할 수 있음을 미리 알았다면 더 신중했을 텐데. 또 언젠가 찾아올 이별에 조금이나마 덤덤해지기 위해 나의 소중한 인연에게 최선을 다했을 텐데.
나는 언제쯤 현명해질 수 있을까?
지금 주변에 있는 내 인연을 귀하게 여기기를.
인연이 찾아오면 이를 알아볼 수 있기를.
또 인연의 소중함을 알고 시간이 허락하는 데까지 온전히 헌신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