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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진 Mar 11. 2017

각자의 행복, 그리고 방치된 아이들

<아무도 모른다>.  2004. 고레에다 히로카즈






아이를 방치해두고 떠난 엄마를 손가락질하지 않고, 돈이 없어 굶어 죽을 위기에 있는 아이가 편의점일 마저 할 수 없게 만든 사회를 손가락 하지 않는다. 부모의 방치로 인해 어린 여자아이가 죽고, 여학생은 돈을 벌기 위해 처음 만난 아저씨와 노래방을 들어가더라도 말이다. 


 영화는 아이들의 반대편에는 엄마가 여자로서 누려야 할 행복이 있었고, 사회는 그 나름대로의 지켜야 할 규약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과연 엄마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는 것이고, 사회의 견고한 법에 조그마한 융통성을 집어넣을 수 없었던 것일까. 그러나 영화는 그것에 대한 묻지 않았다. 아이의 시선에서 그러한 질문은 불가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던가.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던 것은 아이들의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나조차도 그 해답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모른다>라고 영화는 시작했지만 '그래 나도 도저히 모르겠다'라고 손에 힘이 풀릴 즘에야 영화는 끝났다. 






엄마는 말한다. '나를 버리고 간 아빠 때문이야, 나에게도 행복할 권리가 있잖아?'.  맞다. 이 여자는 아이들을 지킬 권리도 있지만, 자신의 삶을 행복할 권리도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지는 것은 불가능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자는 아이를 버리고 행복을 찾아 떠난다. 사회는 말한다. '너는 아직 일할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일할 수 없다'라고 말이다. 아키라는 지금 돈을 벌지 않으면 3명의 동생과 자신 모두 굶어 죽을 상황에 처해있다. 편의점 직원은 고아원에 갈 것을 권유하지만 소용없다. 고아원에 가게 되면 아키라는 동생들과 헤어져야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괴롭힌 것이 사회의 안정망으로써의 '법'과 엄마이자 한 여자가 누릴 수 있는 '개인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동안 분노를 던진 수 없었다. 그 법과 개인의 행복이 무너질 때 사회의 어느 지점도 분명히 금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아키라는 엄마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가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해 어떤 아저씨와 노래방을 갔다가 나오는 모습이 엄마의 모습과 겹쳐지는 순간 엄마를 마음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동생들을 묵묵히 보살피는 삶 뒤로, 친구들과의 즐거움을 맛볼 때 엄마가 말하는 '누려야 할 행복'에 대해서도 조금 이해했을 것이다. 동생들을 버려야만 행복할 수 있고, 행복을 버려야만 동생과 살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다. 아키라는 그렇게 하고 싶어 하던 야구를 하고 돌아온 뒤 여동생의 죽음을 보았다. 자신의 가장 큰 행복이었던 야구와 동생의 목숨이 바뀌는 것을 보았으니, 이제 이 소년은 다시 야구를 못할지 모른다. 아직 자신에게 남아있는 동생이 두 명이나 있기 때문이다. 



아키라에게서 야구를 뺏어간 것은 누구인가. 3명의 동생들인가, 동생들을 방치하고 야구를 하던 자신일까. 우리를 버리고 떠난 엄마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지도 모를 아빠일까. 그들 각자에게 행복이라는 이유가 있었기에 사회를 탓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를 탓하기에 아키라는 너무 어렸고 순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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