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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 Ing Dec 08. 2022

19살,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겨울

지금의 나를 만드는 경험들에 대하여

공부를 열심히 했던 좋은 대학을 목표로 했던 한 고3은 수능을 망쳤다. 수능을 잘 보려고 "너무" 노력했기 때문이다. 혹여나 앞머리가 거슬릴까 평소와 다르게 삔으로 단디 꽂고 나갔고, 소화가 잘 안될까봐 평소와 다르게 죽을 먹었고, 긴장될까 평소와 다르게 점심시간에는 누구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소와 다르게 시험을 더 망쳤다.

망쳐도 크게 망쳤으리라는 생각은 안했던 것 같다. 수능 후 가족들과 밥을 먹고 집에 돌아와 가채점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내가 지원한 대학들의 수시 최저등급을 거의 맞추지 못 할 것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나는 당시 정시보다 수시에 집중한 학생이었고, 수능등급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내가 지원한 수시 6개중 최저등급이 있는 전형은 5개였다. 최저등급이 없는 나머지 하나는 그 중 가장 좋은 학교였다. 하나 더, 수시전형 카운트에 포함되지 않는 과학기술대학교. 그렇게 두 곳만 내가 넘볼 수 있는 게 되었다. 그리고 그 최저등급은 평소에 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가채점을 한 후 나는 큰 절망에 빠졌다. 평소 미끄러지지 않던 수리 과목에서 크게 미끄러져 최저등급이 있는 전형은 모두 최저를 못 맞추게 된 것이었다. 내 방 문 앞에서 조용히 딸래미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시던 부모님은 문을 열고 나온 딸의 크게 실망한 모습에 더 많이 당황하셨다. 정말 인생이 망한줄만 알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는데, 왜 시험때만 되면 이렇게 망하나 싶기도 했다. 시험때만 되면 괴롭히던 만성 신경성 질환들이 나를 또다시 괴롭혔고, 그 긴장하던 습관이 어디 가지 않았다.

많이 속상해하던 나를 엄마가 집 앞 공원으로 데리고 나갔다. 공원을 걸으며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이 아직 기억난다. 가장 좋고 가고싶던 학교만 남은 거라고. 그 말에 나도 웃으며 "맞네 가장 가고싶던 곳만 남았네." 라고 했다. 그 날 엄마와 공원을 걸으며 제일 가고싶던 곳만 남았으니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하면 된다고 얘기했다. 해탈한 웃음이었지만, 더 이상 그렇게 불운하게 느껴지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이미 전형료를 낸 최저등급이 달성되지 않는 학교의 시험들은 그냥 보러 가기로 했다. 결국 남은 "최최종" 엔트리에서도 비슷한 논술과 면접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돈도 아까운데...'하며 가서 현장 경험이나 쌓기로 했다. 당장 다다음날인 수능 주 토요일부터 면접이 있었지만 그것도 그냥 면접 예행연습치고 가기로 했다.

수능 다음 날, 등교한 후 가채점 결과를 밝히자 모든 선생님들이 깜짝 놀랐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제일 좋은 학교 붙으면 되죠." 마음은 쓰렸지만 뭐 별 수 없었다. 이미 벌어진 결과였고, 나는 내게 남은 두 기회를 위해 다른 학교의 면접과 논술시험을 보러 나섰다.

수능 다다음날 토요일에 있던 면접은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보았다. 면접을 보면서도 '아, 이건 합격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수능을 보았으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어려운 면접도, 논술시험도 있었지만 다 예행연습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다.

남은 두 곳 중 한 곳은 제일 가고싶던 학교, 다른 한 곳은 갈 수 있을것이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던 학교였다. 후자는 과학고 출신들이 대거 가는 학교라 내 주변에는 그 학교를 지원하는 친구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몇 년 위 선배 중 한두 명만 그 학교에 진학했던, 일반 고등학교 출신이 가는 학교라고는 생각되지도 않던 학교였다.

제일 가고싶던 학교의 면접은 어려웠다. 제일 갈 수 있을것 같지 않았던 학교의 면접은 외로웠다. 두 곳 다 결국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점점 마음이 무거워져만 갔다.

그러다 12월이 되고, 수능 성적 발표일이 됐다. 나는 등급이 확실하지 않은 과목은 없었기 때문에 성적표를 받기 전까지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 떨어지면 정시는 어떻게하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성적표를 받고 깜짝 놀랐다. 내가 잘못 본 것인줄 알았다. 내 수리 등급이 올라가 있었다. 내가 가채점에서 틀렸다고 생각한 두 문제가 둘 다 맞은 상태였다. 알고보니 문제를 잘 풀어 OMR에 표시하고는 가채점을 위해 옮겨적을때 연속된 두 문제의 답을 바꿔서 옮겨적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내가 지금껏 봤던 모든 수시전형의 최저등급을 통과하게 되었다.

졸지에 선구자가 됐다. 내가 해탈한 상태로 봤던 시험들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내가 그 시험들을 보러 가지 않았더라면, 자포자기하고 시험날 독서실에 갔었다면, 면접을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 난 얼마나 후회하고 있었을까?

예상한 대로 긴장을 하나도 하지 않고 봤던 시험들에서 나는 합격했다. 그 중에는 합격하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정말 다행이었다. 가장 좋은 학교에서도 합격하지 못했고,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학교도 합격하지 못했다. 결국, 수능 후 자포자기했다면 나는 재수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수능을 잘 봤더라도 내가 후련한 마음으로 편하게 면접과 시험을 치루지 않았다면 이 합격도 어려웠을수도 있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인생은 어쩜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흐르는가.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인생을 더 살면 살수록 나의 19살의 경험이 떠오른다. 할까 말까 할때에는 해보자는 생각을 한다. 나중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망했다고 생각될 때는 반대로 생각한다. 그래도 더 좋은 것만 남았네! 너무 부담되고 긴장될 때에는 마음을 비우도록 노력한다. 오히려 겁먹어서 잘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취업, 이직에서 떨어질 때에는 대학교 입시를 생각한다. 여기서 떨어져도 더 좋은 곳에 붙을수도 있다. 그저 운이 따르지 않았고 핏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나는 불합격 통보를 받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학교에서 추가합격을 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지방으로 떨어져 친구 하나 없는 곳에서, 추가합격이라는 바닥부터 시작할 게 명확한 곳에서 도전할 것인가, 서울에서 가장 친한 친구와 같은 대학을 다니며, 학교장추천과 논술전형 두가지로 모두 합격한 곳에서 좀 더 평온하게 다닐 것인가.

19살 겨울, 그 울고 웃던 한 해의 마지막, 나는 도전을 선택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이 너무나 고맙다. 비록 밑바닥에서 고생하느라 학교를 그만두고 싶던 적도 있지만, 그 선택이 있었기에 내가 여기에 있다. 도전을 시도하게 해 주고,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덕에 개발을 접해볼 수 있었고, 전공을 바꿀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성공을 맛보고, 또 다시 도전할 수 있게 해준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10년 전의 나에게 오늘 처음으로 감사의 글을 남긴다.


그리고 내일은 수능 성적 게시일이다. 모두가 나와 같이 예상보다 성적이 높게 나오길, 또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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