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눈빛들의 자리에는 하나같이 심술궂은 내가 서있었다. 애초부터.
제주시를 홀로 찾아갔어. 이유를 대자면 가을, 더는 휴가를 미룰 수 없었고 이참에 긴 산책을 하려고 했어. 먼지처럼 일렁이는 이런저런 마음들은 시야를 뿌옇게 흐려놓았으니까. 느린 걸음으로 닦아내고 싶었지.
감흥 없는 박물관을 거닐다 치쳐 호텔로 돌아가려던 계획은 불 꺼진 버스 정류장에서 틀어졌어. 택시도 기웃거리지 않는 곳. 가로등 하나만이 보여. 곧 등불은 꺼졌어. 휴대폰도 잠들었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어둠 속에서 발끝을 곤두세우고 걸어갈 수밖에 없었지.
터벅터벅 발소리는 메아리를 만들었어. 누군가 뒤로 다가와선 내 목을 쥘 것 같아. 그럴 때면 뒤를 흠칫 돌아보았어.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눈알을 부라리며 내 몸을 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따가운 경적 소리와 함께. 그 외침은 나를 혼내는 듯했어. 앞을 보아도 부족한 지금 어딜 뒤돌아 보느냐고. 그렇게 나는 그 눈빛을 바라보며 떠나지도 기다리지도 못했어.
다시 걸었어. 차도와 숲길 사이를. 비를 맞는 듯 가을바람이 흠뻑 리넨 재킷에 스며들어. 검녹색 초목으로 가려진 숲 속에서는 이따금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 그래. 분명 그들은 나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럴 때면 내 숨소리가 낙엽처럼 휩쓸려 공중으로 올라섰다 바닥으로 꽂히곤 했어. 나는 두 팔로 스스로를 안고서 성큼성큼 위축된 흙길 사이를 걸어.
불빛과 횡단보도, 그리고 표지판이 이제야 보일 때. 마음을 놓았지. 갑자기 몽둥이처럼 개 짖는 소리가 내 목덜미를 때려잡았고, 몸이 굳어버린 채 혼잣말을 해버렸어. "왜.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다음날 늦은 아침. 바다를 왼쪽 허리에 끼고 걸어갔어. 걸었다기보단 전날 다녔던 거리만큼 쑤신 허벅지를 축으로 몸을 비트는 꼴이었지. 나무껍질 같은 바다 위 직선으로 그어진 방파제가 보여. 가을 평일. 사람은 없어. 베이지색 옥스퍼드 셔츠를 방파제 바닥에 깔고 누웠어.
많은 생각을 하려 이곳까지 왔는데 아무런 마음도 일지 않아. 바람은 발 밑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를 돌며 휘파람을 불었어. 그 음률에 맞춰 파도가 부딪쳤지. 시계초처럼. 철썩-철썩. 이곳은 바람이 새는 창문 그리고 시계가 있는 실내 같았지.
그렇게 몇 시간을 트인 실내에서 숨 쉬고 있었어. 느낌은 평소와 같아. 퇴근 후 집 앞 카페에 앉아 있는 듯. 집에 누워 있는 듯. 떠오르는 집은 계속 바뀌었어. 가족과 함께했던 네 곳의 집. 학교 앞 여섯 곳의 하숙집. 그리고 회사 근처 세 곳의 집. 시간은 멈췄어. 추적하듯 발원지를 기억해내려 했지. 지금 누운 이 자세는 언제부터였을까 하는. 다시 짐을 챙겼어. 어딘가 또 몸을 눕히기 위해. 그리고 또 짐을 싸야 할 곳으로 가방을 메고 걸어갔어.
저녁. 이미 붉게 탄 따가운 얼굴에 선크림을 바르고 호텔을 나왔어. 해안에 도착했을 때 해는 완전히 졌어. 얼굴에 뒤덮은 기름칠은 쓸 데 없었지. 빗겨낸 머릿결 같은 바다 위 단선으로 그어진 방파제 길에는 가로등도 없어, 멀리서 들리는 외국인의 알 수 없는 말소리 만으로 누군가 지나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
바람에 펄럭이는 팔을 녹슨 난간에 걸치고 바라보았어. 흐릿한 음영으로만 해안선을 가늠할 수 있는 흑색 하늘과 검은 바다를. 멀리 불빛들이 무성의한 점으로 이어졌어. 나는 감시하는 미어캣처럼 바다를 사방으로 십분 쯤 바라보고 있어. 그때, 환각처럼 그 불빛 점들의 심술궂은 표정이 보였어.
방파제 끝자락. 홀로 서 있는 나를 거친 원으로 둘러싼 수백 개의 불빛은 내 앞길을 조밀하게 막고는 저 해안선 뒤에 무엇을 숨겨두고 당당히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 이어폰으로 들리는 웅장한 노래에 들떴어. 저 불빛들을 넘어서면 그 어떤 것을 쟁취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이 순간.
가사에 맞춰 무엇을 바라는지도 모른 채 도취한 나는 바다를 노려보았어. 하지만 응답 없는 지금 주위에 융단처럼 두꺼운 바다가 펼쳐져 있고, 그 표면 위 융털 같은 조그만 파도 돌기들은 꿈틀거리며 나를 위협해. 움직임의 색깔은 빛까지 먹어치운다는 블랙홀처럼 검어. 투명한 몸 밖으로 빛을 내 나방들을 꾀어 잡아먹는다는 동굴 속 커다란 투명 애벌레처럼, 뱃속에 삼킨 빛들이 거친 피부 같은 파도에 살짝 투과되어 제 덩치를 과시해.
머리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어. 이따금씩 가로지르는 비행기마저 머리를 짓누르는 듯했지. 언제라도 덤벼들겠다는 듯이. 방금 마신 제주 막걸리에 취해 화가 났어. 세상은 왜 기대를 저버리고 혼을 빼놓고는 암초까지 숨겨놓을까. 밀려오는 해일과 갑작스러운 암초들이 무심히 나를 긁고 가버리는 걸 막아낼 순 없지만 파인 곳의 따가움은 순전히 내가 치유해야 하는 현실의 영역이야. 화는 금세 사그라들었어. 회를 낼 대상도 없으니까. 숯처럼 검댕이 된 채 의기소침해졌어.
그러자 해안선의 불빛들이 사람들의 눈빛으로 보이기 시작해.
말없이 바라보는 의미 없는 시선. 제리에게 살이 뜯기는 톰을 보는 듯 편안해 보여. 불빛의 손짓은 들리지 않고 목소리도 보이지 않아. 시간이 꽤 흘러 주변엔 아무도 없어. 그러다 문득 경주마처럼 스스로 눈 옆을 거울로 가린 내 모습이 떠올랐을 때. 노려보고 무심하게 바라보는 해안선 눈빛들의 자리에는 하나같이 심술궂은 내가 서있었어. 애초부터.
마지막 날 연기된 비행에 시간이 남았어. 한 번 더 바다를 보러 버스를 탔어. 쏟아지는 엠버 빛 햇살과 낡은 건물이 캔버스 같은 창문에 영상처럼 흘러가는 중이야. 나른한 오후에 사람들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어. 버스에 내려 고향 같은 동네를 걸었어. 마지막 담벼락을 지나니 바다가 갑작스럽게 펼쳐졌어. 그 앞 초원에는 갈색 말들이 뒤뚱거려. 해변에는 젊은 외국인 여자가 아기와 모래사장에 앉아 흙놀이를 하고 있어. 나이 든 부부는 같이 해변에 발을 담그고 걷는 중이야.
많은 걸음으로 도착한 바다에는 비치는 스스로의 모습만 보일 뿐 사실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 지구 반대 편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딱히 내게 전할 말이 없었어. 이는 바람도 내게 보일 춤이 없어. 그저 외딴곳에 홀로 떨어져서야 찾아볼 수 있는 자신의 실체를 만나려 바다를 갔었다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