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 향수

지금. 승용차 한 대가 여름밤 길을 흘러간다.

by 류인환

한강을 배경으로 들새처럼 곳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과 앉아 있었다. 그동안 묽은 땀을 쥐어 짜낸 낮의 생활에 졸여진 나는 강바람에 말끔히 건조되었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떠나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상한 택시다. 조수석은 꺾인 쇠파이프처럼 바짝 앞으로 당겨진 채 접혀있다. 차 안의 햇빛 가리개는 누런 비닐도 뜯지 않은 채 방치되었지. DMB를 자기 쪽으로 당겨놓고 도로와 TV 프로그램 사이를 황급히 번갈아보는 묵직한 아저씨. 눈 동작에 비해 말은 없었다. 오래된 꽃무늬 시트.


어린 시절 익숙한 실내가 떠오른다.




지금 승용차 한 대가, 여름밤 길을 흘러가는 중이다.


DMB 소리가 리듬을 깔고, 창문 밖으로 새는 바람이 노래를 부르는 풍경. 나는 뒷좌석에 앉아 기어코 머리를 창문 쪽으로 당기고 있다. 이마에 닿아 번지는 바람결이 귀로 흘러 희미하게 울렸다 사라졌다 이어폰 역할을 한다.


아마 이 고향 빛깔 나는 아저씨는 뒷좌석 손님이 자리를 넓게 쓰도록 나름의 배려를 한 모양이다. 아니면, 서울 타인들의 도로에서 영역을 지켜내고 싶은 우직한 마음에 조수석을 꺾어 놓았을 거다. 승용차 냄새를 맡아보았다. 얼마나 창문을 열어놓았는지. 혹은 한 번도 방향제를 뿌린 적이 없는지. 자동차는 주인처럼 제 체취는 사라지고 오직 바깥 공기만을 담고 있다.


어느새 바깥은 차돌처럼 검은 세상. 그 위에 수직 수평으로 지표가 되는 가로등은 개울소리가 들리는 외할머니 집 현관 전구 빛이다. 차들은 날파리처럼 빽빽거리며 날개 부딪히는 소리를 낸다. 문득 택시가 나를 어린 시절로 태워 보내려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여름밤의 향수 때문인지. 눈에 띄지 않던 초목들의 낮 동안 진창 흘린 시큼하고도 상쾌한 땀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환경의 체취는 바람결을 통해 팔다리를 밀물처럼 쓸어 넘겨서, 공중에 뜬 채 시간을 헤매는 기분이다.


작게 떠드는 그 DMB는 어린 시절 텔레비전을 무심코 떠오르게 한다. 잊었던 집의 풍경.



지금. 승용차 한 대가 여름밤 길을 흘러간다.


라디오 소리가 리듬을 깔고, 창문 밖으로 새는 바람이 노래를 부르는 풍경. 나는 뒷좌석에 뉘어 기어코 발을 뻗었다. 지금보다 작던 그 발이 유리창에 닿으면, 하얀 김이 희미하게 번졌다 지워졌다 하며 조명 역할을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잠든 척을 하면 아버지의 커다란 등에 업히곤 했다. 그리고 침대에 둥지처럼 안착해 그대로 또 잠을 자려다.


기사 아저씨의 조심스러운 낮은 목소리에 눈을 떴다.


여전히 바깥은 차돌처럼 검은 세상. 그 위에 수직 수평으로 지표가 되는 가로등이 보이는 창문을 열었다. 여름밤의 진한 향기가 살결에 닿아 밀물처럼 쓸려 날아간다. 잊었던 지난날의 향수를 뒤집어쓴 채 그때처럼 눈을 감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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