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빛과 바람

좁은 동네 벽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때 묻은 살점이 보이게 되었다.

by 류인환

언젠가 본 적 있는 사람들. 아니면, 낯설지 않은 오래된 회색 사진들. 그 욕심 많던 얼굴은 낡은 벽돌에 붉은 윤곽으로 남겨졌다. 수십 년 전 그대로.


세월에 부식된 흔적들은 매번 비바람의 진동에 금이 간 페인트 조각처럼 조금씩 뜯어지고 부스러졌다. 그리고 적막한 바닥 아래 화석처럼 퇴적되어 내려앉았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고고한 매장지를 무심히 밟고 드러눕는 우리 역시, 언젠간 층위의 누군가에게 촘촘하게 밟혀 밀폐될 거리에 살고 있다.


거리는 거칠게 잘린 한 끈이다.


우리는 쌓인 가닥 위로 그리고 쌓일 끈 아래로 차곡히 놓였다. 밀폐된 거리는 서로 마주 설 수는 있지만 장님처럼 가늠할 순 없다. 같은 바탕, 같은 바닥을 공유하며 유령처럼 존재한다. 서로의 기억에 제 존재를 온전히 의지한 채.




돌아온 곳. 거리는 또 제 몸 반쪽을 홀연히 바꿔 입었다.


달라진 간판. 없어진 건물 때문에 집으로 가는 길을 두리번거렸다. 동네 거리에는 이젠 모르는 사람들이 스치고 지나간다. 몇 년 전 자주 가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문득 옛 친구를 보았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고 지나쳤다. 그렇게 또 한 사람이 사라졌다.




나이 든 어머니와 할머니가 함께 맞아주었다. 그들은 손님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집안은 변했다. 내가 산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고 내가 산 의자에 앉아 내가 산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래서 내가 여닫던 냉장고는 없었다. 늘 앉던 의자도. 켜던 텔레비전도 없다. 내가 쌓은 층은 내가 살았던 층을 사라져 버릴 기억으로 넘겨버렸다.


곧 이 장면도 훗날 기억 속 붉은 벽이 될 예정이었지.

나도 먼지 조각이 되어 그 자리에 벽돌처럼 박혀있을까.




어느덧 어린 동생은 운전수가 되어 고향까지 차를 몰았다. 익숙한 낡은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 좁은 동네 벽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때 묻은 살점이 보이게 되었다.


온몸을 뉘이던 붉은 고무 대야. 바깥 낡은 화장실은 폭발 후 잔해처럼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다. 집마다 마주 보는 옥상들도 이젠 한걸음에 넘어갈 만큼 허술해 보였지.

먼지에 쌓여 가라앉는 그들의 흔적.


지냈던 세상은 이제 기억에만 남아있어서 나 마저 잊는다면 누구도 알 수 없겠지. 겁이 나기 시작한다.


나도 곧 의미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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