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여정은 한 번의 도착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티백이 놓인 백색 찻잔이 있다.
찻잔 바닥에 물을 따르면 입자들은 태초부터 정해놓은 규칙을 따라 가장자리에서부터 나선을 그리며 이동한다. 소용돌이는 멈추지 않는다. 오랫동안 춤을 추는 팽이처럼.
서서히 거세지는 물의 자전에 티백은 붉은 먼지를 흘려보낸다. 움직임은 물소 떼가 되었다. 그들은 붉은 숨결을 흩뿌리며 대여정을 시작한다. 달려드는 듯 도망가는 듯 제 꼬리를 쫓아 맹렬히 원을 그린다. 그럼에도 고요하다. 찻잔은 백설을 덮은 분지처럼 드높고 묵묵하니까.
찻잔은 바닥에 고인 물소 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수면 위 대류 하는 증기처럼 삶을 마감하기 전 까진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고.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정해진 경로를 따라 순환하는 수천 개의 여정 중 한 여정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 하나의 버스가 지금 보이지 않아도, 묵묵히 차로를 주시하면 언젠가 올 걸 알고 있다. 만약 놓친다고 해도 다시 내게 찾아올 것도 안다. 차로를 주시하며 기다린다면.
그런데 주시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가끔은 삼십 분을 멀뚱히 차도만 쳐다보며 서 있기도 하니까. 특히 남들과 다른 여정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몇 시간이고 원하는 곳으로 바래다 줄 차를 기다려야 한다. 지금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옆 사람은 버스가 이미 끊겨버린 것은 아닐까 발을 구른다.
그렇게 바라던 버스가 왔다. 좌석에 앉은 채 히터 온기, 낯선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에 손이 데워졌다. 따스함에 취한 건 잠시 뿐. 시간이 흐르자 모두들 초조해졌다. 지금, 주시하는 건 시계와 정류장 이름. 사실 버스를 탄 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여정은 한 번의 도착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렸다. 다시 추위에 떨며 차로를 응시한다. 사람들은 무정하게 헤어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곁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붙잡을 수 없다. 각자 이어 갈 다른 여정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는 수 만 가지의 노선이 있고 거미줄 같은 철로를 따라 수 천만 명의 사람들이 제각기 여정을 쫓아 이동하고 기다리고 또 이동한다. 백색 분지에 갇혀 끝없이 순환하는 붉은 물소 떼처럼. 그래서 여정은 지치는 일이다.
우리는 기다리고 응시한 어제만큼 오늘을 기다리며 응시할 것이다. 내일 가야 할 더 긴 시간, 복잡한 차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오늘의 역할로 흘린 땀의 결과와는 별개로 내일, 새로운 역할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어서 가끔은 눈을 감고 안갯속에 파묻혀 주저앉고 싶다.
포근하지만 습기 찬 불쾌함이 감돈다. 그 감정은 불투명한 다음 여정에 있다. 목표를 이룬 사람에게 공허함이란 감기와 같다. 인생이 끝나는 시점까지 목표는 끝이 없고 여정은 구석구석 빈틈을 메워 생겨나기에 우리는 공허함에 만성적으로 시달린다. 차라리 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하는 일상의 걸음은 얼마나 간편한지. 적어도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명확하기에.
우리는 각자의 새로운 역할을 미리 겪어볼 수 없기에 영원히 미리 알지 못해.
햇살이 저물기 직전 늦은 오후. 버스 앞자리에 앉았다.
담백한 회청색 하늘과 오렌지 빛 햇살 사이. 가로수는 바람의 물결에 쓸려 가지들만 남았다. 하나의 기둥에서 수 십 년에 걸쳐 뻗어 나온 앙상한 가지들은 풍성한 머리카락 같아서 나는 지난 희로애락과 눈 감은 얼굴을 거친 가지에 포근히 파묻고 싶다. 그동안 버스는 실 타는 거미처럼 흰색 차선을 타고 이동한다. 의자에 주저앉은 나와는 상관없이 등선을 따라 내려가고 올라가는 정적인 여정으로.
곧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난다.
역에 닿을 때쯤 작년과 같은 안내 음성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버스에 올라서고 다음 여정을 향해 내려간다.
무수히 지나치는 주름진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그들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세상이 담긴 백색 분지가 있다.
물의 입자들은 정해진 흐름에 따라 서로 부딪히며 가장자리에서부터 나선을 그리며 이동한다. 물결은 그저 소용돌이로 영원한 춤을 춘다. 시간의 물결에 따라 우리는 붉은 숨을 일방향으로 내뱉으며 제 여정을 쫓아 뛰어가는 중이다.
찻잔은 바닥에 고인 우리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수면 위 대류 하는 증기처럼 삶을 마감하기 전 까진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