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일기

오늘, 지친 금요일 그리고 성취감과 자괴감

누군가에겐 가벼운 일. 왜 나는 이렇게까지 절실해야만 이룰 수 있을까.

by 류인환

오늘, 7시쯤 회사를 나왔다. 해는 꽤 오랫동안 떠 있다. 지나치는 가로수와 거리 모두 밝다. 공기가 달라졌다. 주변은 햇살을 가득 쬔 마른 옷감 냄새로 가득 찼다. 반면 나는 지쳤다. 내일부터 주말. 당장은 생각하고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머릿속이 비어버렸다. 자동차 바퀴가 지면을 밀어내는 소리, 조잘대는 사람들의 말, 부는 바람이 귀로 들어찼다 사라지고 있다. 마트에서 와인 두병을 사들고 마을버스를 탔다.


최근 일에 대한 태도가 변했다. 예전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었다면, 이제는 더 많고 어려운 일을 소화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불평하지 않고 초연하게. 스스로의 과정에 만족하기보다 모두의 결과를 바라면서. 다만 오늘은 달랐다.


저번 주. 나름의 미션이 있었다. 별 것 아닌 1분 간의 짧은 보고. 내게는 처음 닥친 일이다. 자신이 없었다. 몇 주간 뱃속에 무겁게 자리 잡았다. 모든 자료를 찾아두고 중요한 수치는 외워버렸다. 잊어버릴 것 같아서. 보고 이틀 전, 밤늦게 집 현관을 열자마자 허공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퇴근길에 생각해둔 대사를 바로 읊었다. 입은 알 수 없는 억양으로 오물거렸고 단어들은 뒤집혔다.

입을 닫고 가만히 서 있다가 힘없이 소파에 드러누웠다.

시계를 보았다. 11시 30분. 얼굴을 쿠션에 파묻고 한동안 고민했다. 잠을 잘지, 더 연습을 할지. 다시 소파에 앉아 삼십 분 정도를 연습했고 그제야 말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대신, 이런 날이면 잠을 포기해야 한다. 좀처럼 식지 않는 유리잔 속 뜨거운 물처럼, 머릿속에 산발하는 단어와 얼굴들 그리고 긴장의 열기 때문에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들곤 한다.

다음 날, 보고는 가볍게 지나쳤고, 사람들은 다음 안건으로 바쁘게 넘어갔다. 나 또한 다른 일정으로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못하는 건 없다. 마음이 짓눌리고, 그만큼 절실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의문이 든다.


누군가에겐 가벼운 일. 나는 왜 이렇게까지 절실해야만 이룰 수 있을까.


마음이 가벼워지면, 다른 것에 매료되면, 아니면 으레 익숙해져 버려 소홀해지면 지금껏 쌓아온 것들은 한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내 능력이라는 것. 사실 흩날리는 공기처럼 일시적인 긴장일 뿐이다. 점점 깨닫고 있다. 성취감에 대해 알아갈수록 동시에 자괴감과 불안함도 커진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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