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오늘 일기

오늘, 얼음과 불의 세계

언젠가부터 네, 알겠습니다 라는 대답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by 류인환

언젠가부터 네, 알겠습니다 라는 대답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표정 없이 고개를 돌려 일한다는 걸. 화도 잘 내지 않는다. 상대방이 불평을 하거나 짜증을 내도 감정보다 생각이 앞선다.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대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하면 부드럽게 풀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물론 기분은 상한 상태다. 하지만 감정보다 해쳐나갈 일이 중요하다. 이런 내 모습은 얼음 같아서 다들 내 기분을 궁금해한다.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없다고. 다만 요새는 내 입꼬리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미처 숨기지 못한 입가가 들썩거리면 기분이 좋은 거라고. 그제야 나는 입을 헤벌레 하고는 들켰다고 웃는다.


불평 없이 늘 책상에 앉아 일하는 모습은 마치 로봇 같아서, 가끔 그렇게 일하면 힘들지 않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나는 힘들지 않다고 한다. 해야 할 일이니까. 물론 가끔은 점심시간에 모니터를 끄고 잠을 청한다. 힘들어서.


도와달라고 말하는 게 내겐 너무 어렵다. 헛된 자존심일까. 그 누구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의지하는 순간 나약해진다 믿는다. 철없는 아이처럼 늘 스스로 해결하려는 욕심에 비효율적으로 일하곤 한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될 때도 있다.


매일 아침, 유난히 오래 샤워를 하는 편이다. 내겐 중요한 의식이다. 뜨거운 물에 몸을 적셔 피로를 풀어내고 찬물로 거품을 닦아내는 것. 꼭 개운한 기분으로 집을 나서야 한다. 종종걸음으로 걷다가 뜀박질도 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자기 전, 아이디어를 준비하고 설렌 기분을 만드는 것. 출근길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조급한 기분을 만드는 것. 그래야 얼른 커피를 내리고 자리에 앉아 일을 하고 싶어 할 수 있으니까.



퇴근길에 길고양이 하나를 보았다. 나는 늘 하던 습관대로 눈을 살짝 찡긋하고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들의 언어로 해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고양이도 눈을 찡긋하고 고개를 돌렸다. 기분이 좋아져 활짝 웃으며 길을 걷는 와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게 원래부터 표정과 불평이 없었을까.


나는 꽤 자기중심적이라 내 할 말이 많고, 싫은 내색이 가득한 편이다. 과거를 쫓다 문득 아버지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신입사원의 장례식에 와준 나이 많은 아저씨들은 내게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한다며, 정신 바짝 차려라 말하고 갔다. 그들이 떠나고 텅 빈 장례식장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잠든 날. 그 이후 조금씩 의지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게 되었다. 아쉽다고 해야 할까. 고맙다고 해야 할까. 지금 내겐 그런 것들은 부질없는 감정이 되어버렸다.




숨 막히는 업무로 한 달이 지나갔다. 8년 차 회사생활 중 가장 바쁘다. (돌이켜보면 해마다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쉼 없는 일정에 몸이 젖을 때면, 잠깐 쉬는 텀이 생길 때조차 불안해진다. 지금이 비는 시간인지, 아니면 놓치고 있는 시간인지. 시계 분침이 돌아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다시 스마트폰을 켜고 메모장을 확인하게 된다.


조급한 마음은 가끔 서로 화를 내게 만드는데, 나는 그들이 내가 미워서 화를 내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동시에 나도 그들이 미워서 퉁명스러워지는 건 아니니까. 이때 내 문제를 발견했다. 얼음이 된 나는 불덩이에 난감해졌다는 걸. 언젠가부터 화를 낼 줄 모르게 된 나는 받아 든 불덩이를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담아두게 되었고, 쌓인 불은 커져가다 큰 감정으로 표출하게 된 적이 몇 번 있었다.


최근에, 불을 다스리는 방법을 깨달았다. 이 또한 그날 밤 덕분일까. 언젠가부터 내 감정만큼 상대방의 상황을 생각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일에 몰두하며 잊어버리려 애를 쓰다 보면, 문득 서로 웃고 다른 얘기를 할 때. 그때의 기분은 얼음이 녹듯 사라지곤 한다. 이렇게 조금 더 지혜로운 삶을 배워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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