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라는 옛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제법 무겁고 기괴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 주말,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과 1박 2일 여행을 가자고. 요즘 주말 일정이 거의 없는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친구는 내게 주의할 점 하나를 알려주었다. 이번 여행은 시험에 합격한 친구를 위한 여행이고 그를 포함해서 창원에서 3명, 그리고 전화를 한 친구 한 명만 서울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그래서 나를 포함한 2명이 더 서울에서 내려오는 건 모른다고 했다. 나중에 서프라이즈를 할 계획이라고. 나는 알겠다고 했다. 친구는 서프라이즈 기획에 제법 설레는 말투였다.
회사에서 팀원들과 점심을 먹다가 주말에 친구들과 여행을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평소에 여행을 잘 가지 않는 날 알기에 팀원들은 잘됐다며 한껏 바람을 쐬고 오라며, 어디로 가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답하며 카카오톡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안동으로 간다고 대답했다. 팀원들은 역시 자기 여행도 관심이 없다며 웃고는, 왜 안동으로 가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고 답했다. 팀원들은 한여름에 왜 안동으로 가는지, 그곳은 무척 덥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나중에 친구들에게 물어보고 말씀드리겠다 답했다. 숙소는 어디냐는 물음에 그것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어떻게 그곳까지 가냐는 물음에 친구들 차를 타고 갈 것 같다고 얘기했다.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아마도 음식과 술을 마시고 돌아올 것 같다고 했다. 팀원들은 그럴 거면 왜 굳이 안동을 가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다시 물어보고 알려드리겠다고 답했다.
여행 전날이 되기까지 친구들에게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다만 혹시 물가에 들어가는지, 그렇다면 여벌의 옷과 슬리퍼를 준비해야 하는지 고민이 되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전날 밤이 되었을 때 한 친구가 드레스코드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채팅방에 물어보았지만 마땅한 답이 없었다. 나는 햇빛을 가릴 용도로 최근에 산 캉골 버뮤다 버킷햇을 챙겼다. 그리고 수건 두장, 하루치 옷과 속옷, 세면도구와 스킨로션, 그리고 보조배터리를 커다란 남색 에코벡에 넣었다. (예전에 검은색 가죽 가방을 샀을 때 포장용으로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죽 가방을 쓰지 않고 그것을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토요일 낮 11시쯤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분당 정자역을 향했다. 역 앞 스타벅스로 들어가서 회사에서 제공하는 E북 어플을 켜고 후배가 추천해준 쇼코의 미소를 읽었다. 친구가 한 시간쯤 늦은 덕분에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분당에 사는 다른 친구가 차를 몰고 나타났고 나를 포함한 3명은 안동을 향해 출발했다. 면허가 없는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3시간 동안 우리는 친구들의 과거, 부동산, 사회이슈, 회사일, 자동차, 결혼 등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다. 중간중간 올해는 꼭 면허를 따겠다는 얘기를 세 번 정도 한 것 같다.
중간에 휴게소를 들러 점심을 먹다가, 서프라이즈를 기획한 친구가 창원에서 올라오는 친구들에게 "우리는 휴게소에서 밥을 먹는 중"이라고 카톡을 보냈고, 그들은 왜 우리냐고, 혼자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당황하며 버스에 탔던 다른 승객들을 우리라고 표현했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는데 그것이 통했다.
안동에 도착했을 때는 5시가 되었다. 우리는 창원팀과 정확히 같은 시간에 도착했고 역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와 친구는 서둘러 커피숍 뒷문으로 몸을 숨겼으나, 창원팀 친구들은 뒷문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눈을 마주쳤고 서프라이즈는 실패했다. 그래도 그들은 무척이나 놀랐다고 말해주었다.
저녁으로 소갈비를 먹었다. 안동소주는 생각보다 쓰지 않았다. 나는 왜 안동으로 왔냐고 선배들이 물어본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도 왜 안동으로 왔는지 궁금했다고 했다. 여행을 모집한 친구가 안동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아서 선택했다고 했다. 다들 알겠다고 했다. 다른 친구가 숙소가 어디냐고 물어보았다. 그 친구가 치암고택이라고 했다. 한옥인데 화장실은 좋으니 걱정 말라며. 고택으로 가는 동안 택시기사님은 왜 이런 곳을 숙소로 잡는지 물어보았다. 우리는 한옥을 경험해보고 싶어 선택했다 말했다. 기사님은 자신에겐 이런 곳은 열악한 옛 동네일 뿐이라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이지만, 이곳은 다른 세상이라고 말했다. 백발의 어른들이 무단횡단을 하는 곳. 그들을 젊은 운전수들이 나무라면 하극상이라며 화를 낸다고 한다. 우리는 실감이 나지 않아 그냥 웃어넘겼다.
숙소는 정말 오래된 집이었다. 때 묻은 목조건물에는 낡은 가구들과 잡다한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 관직을 지낸 누군가의 집. 실내 곳곳을 수많은 한문으로 덮어 놓았다. 21세기를 사는 내가 보기엔 그 모습은 인스타그램에 간간히 보이는 현대미술 포스팅과 다를 바 없었는데 최근에 보았던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본 온몸에 잉크를 묻히고 커다란 도화지 위를 뛰어다니는 행위예술가와 벽에 깨알 같은 글씨를 그리는 승려들이 생각났다. 그러자 이곳에 있었을 그 선비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새벽. 비스듬히 새는 창문 바깥엔 먹을 칠한 듯 새까만 어둠. 간간히 벌레들과 고라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사라진다. 일렁이는 촛불이 희미하게 밝히는 조그만 정사각형의 방. 몸을 푹신하게 늬울 침구마저 없는 감옥 같은 돌방 중앙에 깡마르고 왜소한 남자 하나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상투를 벗은 머릿결은 누군가 휘어잡은 것처럼 산발했고, 그 아래 까맣게 탄 얼굴에는 새하얀 눈알이 번들거리며 사방에 나열된 글자를 훑는다. 서체는 칼같이 날카롭고 뱀처럼 휘갈긴 모습으로 그 남자를 찌를 듯 밸 듯 위협한다. 그 남자는 몸을 일으키고는 방구석으로 다가가 알 수 없는 단어를 웅얼거리며 방벽에 글귀를 덧대어 새긴다.
문득 한문으로 가득한 실내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교와 사대부, 그리고 선비라는 옛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생각보다 무섭고 기괴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동시에 나는 친구들과 함께 그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부적처럼 뒤덮은 방에서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고 건너편 방 사람들의 항의를 듣고 의기소침해지고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쐬며 잠이 들었다.
며칠이 지난 지금 한여름의 밤. 지금 나는 불 꺼진 방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굳게 닫힌 창문 밖에는 가로등과 건너편 집들의 닫힌 창문이 보이고, 그 여린 빛들이 밀려와 거실 바닥에 놓인 바질을 심은 화분을 비춘다. 거실 중앙에 놓인 책상 위에는 먹다 남은 음식, 그 위로는 빈 벽이 있다. 적막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시 그 고택의 옛 주인이 생각났다. 그 집의 벽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