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축제의 끝이 가져다준 여운이 이번 일을 수락하게 만든 것처럼.
12월이 다가온다. 돌이켜보니 작년부터 꽤 새로운 일을 겪은 기분이다. 오늘, 결혼식 사회를 보고 왔다. 내가 그런 걸 수락했단 말에 다들 놀랬다. 남의 결혼식을 망칠 거냐고. 지금이라도 거절하라는 사람도 있었다. 동시에 그 모습이 무척 재미있겠다며 꼭 참석하겠다고. 나는 그냥 주어진 대본을 책 읽듯 읊으면 될 것이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사회를 봐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을까. 당연히 거절했을 일인데. 남들 앞에서 살갑고 유창하게 말한다는 건 내겐 불가능한 일이다.
어제, 갑작스러운 보고 건으로 혼자 창원 출장을 가게 되었다. 늦잠을 잔 탓에 새벽부터 뜀박질로 겨우 기차를 탔다. 3시간의 여정 중 2시간을 푹 자고 나머지 1시간 동안 출장 건을 준비했다. 창밖을 바라보며 내 머릿속에 깃든 임원분과 상상의 대화를 펼쳤다. 꽤 적절한 대답을 몇 개 생각한 뒤 이어폰을 꺼내 들어 남은 시간을 보냈다. 보고는 부담스럽거나 긴장되지 않았다. 다만 임원분은 내게 왜 그리 손을 바르르 떨고 있냐 물었다. 보고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내 머릿속에 깃들었던 그분이 언급하지 않았던 코멘트가 나왔다. 보고가 끝나자 사람들은 곧장 자리를 떠났다. 나는 빈 회의실에 남아 샘플을 정리했다. 그때 어떤 기분이 들어찼다.
작년엔 우연한 기회로 TV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었다. 한 달 간의 인터뷰, 3시간의 촬영 그리고 한 달 뒤 방송 당일까지 내 머릿속은 부담과 설렘으로 가득 찼다. 방송이 나간 후 낯선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 열기는 서너 달이 지나자 온전히 사라졌다. 처음 소설을 쓰고 POD책을 발간했을 때는 원대한 일을 끝맺은 기분이었다. 모아둔 그림을 다듬어 액자에 걸었을 때. 운전면허를 배우기 시작할 때. 여행을 떠났을 때. 전세를 구하려고 대출을 받았을 때. 홀로 해외출장을 떠났을 때. 그 모든 새로운 것. 부담과 설렘은 하나의 '축제'다. 축제의 시작은 내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축제의 끝엔 적막과 여운이 남는다.
모든 출장업무를 마쳤다. 돌아가는 열차 시간이 1시간 정도 남았다. 마침 근처에 출장을 온 친구가 차를 몰고 마중 나왔다. 바빠서 한 끼도 먹지 못했다. 빈속에 커피를 마시는 와중 친구가 말을 꺼냈다. 6년간 사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솔로로 사는 건 어떤 느낌이냐 내게 물어왔다. 나는 그냥 연락 없는 밤의 시간을 보낼 거라고 간단히 대답했다. 만약 지금 내게 다시 물어온다면 이렇게 말해줄 거다. 6년. 그 축제의 끝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어제 마스크팩을 덮고 잔 탓에 얼굴이 뽀송뽀송했다. 입고 나갈 정장을 스타일러에 넣고 돌리는 동안 마지막으로 사회자 대본을 읽어보았다. 꽤 말투가 딱딱했다. 고민 끝에 나를 버리기로 했다. 결혼식의 주인공들을 위해서. 최대한 살가운 말투로 낭독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처음 부탁을 수락했을 때 어둠 속에서 글만 읽으면 될 것이란 추측과 달리, 결혼식장은 생각보다 밝았고 훤히 드러났다. 대본에 적힌 순서는 그때그때 틀어졌다. 식장 직원은 실수하고 있는 내게 비교적 차분하게 잘하는 편이라 위로했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오늘 또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사람들이 작별 인사하고 무대를 치우는 동안 남은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축제는 끝이 났다. 하객들은 모두 떠났고 신부의 아버지는 슬픈 눈가, 기쁜 입가로 빈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조용히 그들에게 인사하고 결혼식장을 빠져나왔다. 어느새 해는 지고 골목은 고요했다. 방금 전 낮의 활기는 온데간데없다. 지금 나는 여느 때처럼 밤바람을 맞으며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 중이다.
그 와중에 생각했다. 또 누가 내게 새로운 일을 맡겨도 흔쾌히 수락할 수 있겠다고. 지난 축제의 끝이 가져다준 여운이 이번 일을 수락하게 만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