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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백색 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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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Sep 23. 2020

백색 밀실 1 백색 소음

어쩌면 나는 이 가상의 세상에 지워져 갈기갈기 조각난 데이터 일지 몰라.

  



 나른한 기분에 정신이 들었어. 그리고 한동안 눈앞을 주시하고 있었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내 시야에는 흑백의 점만 가득해. 마치 신호가 사라진 TV 화면 같은 흑백의 전파. 입자들은 날렵하고 급박해. 어쩌면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여러 입자들이 산란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맛보는 중일지도 몰라. 입자들의 파동은 소리를 흩뿌리고 있어. 그 소리는 꽉 찬 먼지 같기도, 유리잔 위로 튕겨나가는 탄산음료의 기포 같기도 해.


 그러다가 문득 어떤 여자의 뒷모습이 떠오른 거야. 평온한 주말 저녁. 습기로 흐려진 창문으로 흘러드는 무지갯빛 햇살. 그 여자는 수전을 틀고 설거지를 하는 듯 해. 스테인리스 싱크대에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 그리고 가냘프게 흔들거리는 어깨의 몸짓으로 가늠할 뿐이야.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과 붉은 잠옷. 그래. 떠오르는 것 그것뿐이야. 곧 의문이 들었어. 그 여자는 누구일까. 전혀 기억나지 않아. 아마 지금 나는 꿈을 꾸는 중일 테고, 그 여자 역시 꿈의 잔해일 뿐이겠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그녀의 환영은 사라졌어. 그리고 다시 신호를 벗어난 TV 화면의 입자만이 펼쳐졌어.


 그런데, 나는 누구일까.

 

 놀랍게도 전혀 모르겠어! 내가 무엇인지 말이야. 지금 나는 우주 속 유영하는 먼지 덩어리처럼 살갗이나 껍질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아. 그래서인지 '나'라고 할 수 있는 입자 덩어리는 사방에서 들썩대는 흑백의 픽셀과 부딪히고 있어. 픽셀의 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각각의 점이 내 몸이라 할 수 있는 것을 통과할 때마다 소리가 난다는 걸 알 수 있어. 어쩌면 나는 이 가상의 세상에 지워져 갈기갈기 조각난 데이터 일지 몰라. 아니면 나 역시 산란하는 흑백의 입자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두려움이 차올라. 지금 내 처지는 잊혀진 유령 같아.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어. 그러자 부딪히는 소음을 통해서 육체가 느껴져! 꼬리를 흔드는 유선형의 바다생물 같기도 했고, 네 다리로 뜀박질을 하는 표범 같기도 해. 더욱 발버둥치자 허공을 젓는 두 팔과 건장한 다리가 느껴졌어. 인간의 육체 말이야. 곧 발바닥을 지탱하는 묵직한 지면이 생겨났지. 안도했어. 곧 이 이상한 꿈에서 깨어날 거야. 그리고 눈을 뜨면 서서히 불 꺼진 방의 모습이 보일 거야. 날짜와 시간을 보고 이곳이 안전한 현실이며 누구도 날 해칠 이유가 없다는 걸 알게 되겠지. 나는 습관처럼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려 했어. 


 그런데 전혀 기억나지 않아! 여전히. 내 얼굴, 내 이름도. 지금 느낄 수 있는 건 가빠진 호흡. 헐떡거리는 심장과 복부의 팽창감뿐이야. 어서 잠에서 깨어나야 해. 눈앞의 픽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어! 

 

 갑자기 픽셀의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지기 시작해! 


 그리고 검고 흰 입자들은 각기 모여 두 개의 군집을 이루었어. 그 모습은 백색 물결 위에 펄럭이는 검은 깃발이자, 빙하 틈으로 드러난 밤하늘의 검은 강줄기야. 여전히 픽셀은 흩날리며 변화하고 있어. 마치 밤의 눈보라처럼. 그래! 꼭 눈보라 같아. 함박눈이 쏟아지는 백색의 산등성이, 검은 초목. 그리고 나는 그 산길을 걸어가다 잠깐 잠이 들었던 거야.







 

 기록 이후 최대의 폭설. 세상은 백색 바다가 되어버렸어. 간간히 부표처럼 설면 위로 드러난 건물들이 어제의 풍경을 암시하는 중이야. 도로와 자동차 그리고 횡단보도 같은 것은 사라졌어. 사방에서 사이렌 소리와 다그치는 안내방송을 쏟아내고 있지만, 눈발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아. 건물의 옥상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쌓인 눈을 저 백색 바다로 퍼붓고 있어. 반면에 건물 안에 갇혀버린 사람들은 반쯤 묻힌 창문에 얼굴을 대고 기도를 하거나, 눈발 사이 비틀거리며 간신히 비행하는 헬기와 드론을 가리키며 손을 흔드는 중이야.

 

 반면에 나는 살기 위해 산을 오르고 있어. 남은 몇몇의 사람들과 산 정상을 향하는 중이야. 함께 산을 올랐던 수천 명의 사람들은 매 분마다 쏟아지는 눈사태를 맞고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어. 우리는 더는 비명을 지르지 않아. 묵묵히 체온을 아끼며 무뎌지는 발의 촉감에 신경을 곤두세웠어. 산 봉우리에 닿기만 한다면 살아남을 거야. 옥상에 여느 사람들처럼 간단한 거처를 만들고 쌓이는 눈발을 산 아래로 밀어내면 돼. 


 지금 내리는 산사태는 사실 먼저 정상에 닿은 누군가의 짓이야.


 정상에서 그들을 만나면 백색 바다로 빠뜨려버리겠다고 다짐했어. 수천 명을 죽인 악마들이라고. 하지만 나 역시 정상에 닿으면 그들처럼 산사태를 만들어내지 않고는 쌓이는 눈을 털어낼 수 없을 거야. 결국 또 다른 누군가가 이를 갈며 내 멱살을 잡으려 올라오겠지. 그들이 내게 달려온다면, 나는 공포에 질려 더욱 눈덩이를 밀어낼 수밖에 없을 거야. 언젠가 눈발이 그치고 햇살에 젖은 지면이 드러난다면, 퍼렇게 식어버린 그들의 표정을 마주할 수 있을까. 급격히 얼어버린 그들 중 몇은 기적적으로 살아날지도 몰라. 그러면 나는 그들의 화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아니 나 말고도 지금 함께 산을 오르는 다른 사람들. 그들은 앞으로 정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백수천 명을 죽일 거란 걸 감안하고 있을까. 고작 눈덩이를 던지는 행위로 말이야.


'!' 또 한 번, 산짐승의 울음 같은 산사태 소리가 울려!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며 뭐라도 붙잡고 있으라 외쳤지. 정상의 사람들을 저주하며. 백색의 연무는 저 멀리부터 풍경을 지워가는 중이야. 더는 가망이 없어 보여. 그리고 지쳤어. 나는 설면에 꿇어앉아 두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두었어. 그리고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되뇌었어. 저 연무가 설원 아래, 층층이 쌓인 백색 밀실로 데려갈 사람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래서 만약 그 제물로 인해 더는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게 된다면 나를 데려가라고. 나 역시 정상에서 누군가를 죽이며 살아가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해명하고 싶었어. 훗날 다시 해가 떴을 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굳어진 날 사람들이 발견한다면 적어도 비난하지는 않을 거야. 난 분명 모든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기를 원했어.


 '!'


 금세 눈과 귀에 백색 눈이 들어찼어. 암흑이 되자마자 소음마저 사라졌지. 체중을 지탱하던 살얼음은 뜨거운 시럽을 얹은 빙수처럼 한없이 내려앉고, 옷깃은 시린 마찰음을 내며 백색 바다 수심으로 급류를 타듯 미끄러지는 중이야. 간간히 둔탁한 소리와 함께 팔다리가 부딪히고 튕겨나가는 게 느껴져. 이미 얼어붙은 감각에 알 순 없지만, 점점 몸이 바스러지고 있는 것 같아. 그러다 갑자기, 몸이 허공에 붕 떴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야. 


 부릅뜬 시야에는 공중에서 산산이 분해되는 눈의 입자와 그 사이로 들어차는 햇빛이 보여. 햇빛? 구름이 걷혔어. 너무도 거짓말처럼. 이제 사람들은 더는 다치거나 아프지 않을 거야. 서로 얼싸안으며 얼어붙은 상처를 녹이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눈을 감았지. 그들이 서로를 용서했으면 좋겠어. 미소를 지었으나, 이미 얼굴이 얼어붙은 듯 해.




 ‘첨벙!’


 충격음과 함께, 뭐라 생각할 틈 없이 기를 쓰고 헤엄쳤어. 수면 위로 올라섰지. 뭍 위로 기어 나와 기침을 내벧으며 격정에 떨고 있는 몸을 껴안았어. 숨이 제대로 쉬어질 때쯤 사방에서 피어 나오는 열기가 느껴져. 밀려드는 온기가 일으키는 쾌락.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정신이 아득해졌어. 한동안 '나'라는 존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그러다가 축축한 옷깃이 살갗을 간지럽히고 있단 걸 알게 되었을 때야 주변을 돌아보았지. 이곳은 온천이야! 방금 전까지 내렸던 눈이 개울길 외곽에 성벽처럼 쌓여있지만 온천과 그 주변의 넓은 대지는 봄처럼 푸른 잔디로 가득해. 강처럼 이어진 온천 개울 주변으로 산기슭이 보여. 


 백색 연무는 내 기도를 들어준 것이 아니었어. 그저 정해진 시간에 눈이 잦아들었고 해가 비춘 것이야. 그리고 우연히 온천에 떨어졌어. 이곳에 나처럼 조난당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르지. 도움이 필요할 거야. 나는 젖은 패딩을 벗어던지고 산기슭을 걸었어.


 오솔길 끝에 검은 철문이 보여!


 다급히 그곳으로 달려갔지. 몸은 활기를 되찾았어. 신발끈을 묶어 젖은 신발을 어깨에 걸쳐 메고 맨발로 지면의 열기를 고스란히 받아내는 중이야. 비스듬히 열린 철문 안으로 들어섰어.    걸었을  수평선 멀리 건물  채가 보여. 거대한 백색 궁전. 건물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던 어떤 사내가 날 발견했어. 나는 금세 울음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지. 그는 멀찌감치  몰골을 보고는 서둘러 달려왔어. 그리고 질문했어. 어떻게 이곳까지 찾아왔냐고. 나는 그간 도시에서 있었던 재해 상황을 이야기했고, 산사태에 떠밀려 이곳으로 떨어졌다고 말했지


 그는 우선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어. 다만 이곳은 사원이며, 내가 휴식을 취할 곳은 이곳으로부터  걸리는 거리라서 차를 부르겠다고. 그는 무전기처럼 보이는 거대한 전화기를 꺼내 사람들을 불렀지.  어디선가 중형차가 다가왔어. 나는 젖은 몸의 물기를 털어내는 시늉이라도 하며 얼른  안에 들어섰어. 다리에 힘이 풀리고 졸음이 쏟아지는 중이야. 숙소엔 나처럼 급류에 떠밀려 온 사람들이 있을 테고, 친구들과 이웃을 만날지도 모르지. 그러다가 의문이 들었어. 


 그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아마 몸을 더 녹이고 회복을 하면 생각날 거야.


  

 뒷좌석에 몸을 기댄 채 진눈깨비가 내리는 바깥 풍경 그리고 조금씩 히터 온기가 느껴지는 실내를 번갈아 바라보았어. 닫힌 창문 바깥으로는 스산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는 중이지. 하지만 유리창을 통해 전해지는 울림은 보잘것없어. 그래서 문득 혼란스러웠어. 사실 차에 탄 순간부터 바깥세상은 벌써 햇빛 가득한 정상적인 여름의 날씨로 돌아왔고, 지금 보이는 유리창 밖 풍경은 거짓이 아닐까. 누군가가 날 속이려고 가상의 화면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쩌면, 내가 보는 것과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 드는 햇살을 바라보면서도 사실은 지금은 한밤이고, 내가 보는 창문의 햇살은 그저 거대한 창틀의 영상일 뿐일지도 몰라. 그리고 그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새와 바람의 소리, 신호등 안내음 그리고 사람들의 말과 걸음소리까지 모두 나를 속이려 드는 거야. 그런 생각에 미치자 또 의문이 들었어.


 무엇이 날 속이고 있는 것일까.

 왜 날 속이고 있는 것일까.

 

 차는 속력을 멈췄어. 눈 앞에 거대한 건물이 보여. 건물은 방금 전 보았던 백색 사원과 다르지 않았지. 다만 온통 검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그제야 생각이 났어. 검은 대리석의 타지마할 궁전. 그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타지마할 궁전이 내가 사는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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