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이나 울부짖던 3살 꼬마의 모습이 기억난다.
지난 토요일 아침, 막내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고 병원을 갔다. 작은 아버지는 선고받은 시간보다 1년을 더 살다가 숨 멎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내게 병문안을 가 달라고 수없이 말했었지만, 고집스레 찾아가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 거부감을 이해할 수 없었고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병원에는 온 친척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형제를 위해 지난 1년 동안 많은 것을 희생했다. 직장에서의 위치도, 그들의 노동 그리고 건강까지. 내 어머니가 그의 병문안을 위해 매번 서울까지 버스를 타고 찾아갈 때면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더욱 멀리하는 것뿐이었다.
차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나는 3일간 치러야 하는 노동에 대해 걱정했고 잠은 꼭 집에서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삼촌의 딸을 원망했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동안 기어코 찾아오지 않았다고. 삼촌은 이혼 후 딸과 떨어져 지냈고, 나는 그 꼬마가 3살이 된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딸이 찾아왔다. 어색한 검은 옷을 걸치고 온 23살의 꼬마. 20년 전 얼굴이 눈가에 남아 있었다. 명절날 꼬마와 놀다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을 때, 무척이나 울부짖던 3살 꼬마의 모습이 기억난다. 꼬마는 영정사진에 절을 한 뒤 구석에 웅크렸다. 낯선 곳에 들어선 길고양이 눈빛을 한 채. 유골함을 빈소에 넣고 잠그는 순간까지 꼬마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누군가는 어린 그녀가 시간이 지나 부모가 되면 그제야 그 시간을 떠올릴 것이라고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애써 담담한 눈빛을 보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그녀는 그녀 만이 헤아릴 수 있는 거부감과 사투를 벌이는 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