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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Sep 26. 2020

오늘, 연약함과 강인함

그렇게 나는 지금도 매 순간 연약함과 강인함 사이를 맴돌고 있다.

 어제, 어렸을 때 알고 지낸 이모라고 부르던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3D 모델링에 렌더링을 입히는 걸 알려달라고. 나는 평소 친척들의 작은 요청들에 대응하지 않는 편이다. 굳이 내가 해줄 이유는 많겠지만, 모든 부탁이 내게 무용해 보여서 내 별 것 아닌 시간과 노동을 건네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늘 후회했지만 관성 때문인지 더 손을 건넬 수 없게 되었다. 이번엔 새로운 사람이고, 내가 해줄 수 있는 제격의 일이다. 그리고 예술가인 이모의 생활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나는 흔쾌히 토요일 오전에 출발하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누워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토요일 오후에 필라테스 수업이 있다. 그래 운동도 중요하지만, 어릴 적부터 가끔 도움을 받은 이모의 부탁이 더 중요하다. 나는 흔쾌히 운동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러다 가만 생각해보니, 어차피 다음 주까지 나는 휴가다. 그리고 운동은 주말에 하루뿐이다. 충분히 조율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전화해서 월요일 날 찾아뵙기로 말씀드렸다. 


 전화를 끊고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 전화를 할까-말까. 그냥 운동을 포기하고 토요일에 뵐까 라고 고민했던 걸 떠올리며. 우유부단한 행위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두려웠다. 순간의 선택에 따라 하마터면 후회할 일이 생길 뻔했단 것. 그리고 일정을 고칠 수 있음에도 우유부단하게 고민했던 것. 그런 것들이 참 연약해 보여서.

 



 심적으로 강인해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려는 습관이 있다. 혼자 살아간 지 13년이 지났기도 했고, 아버지가 이젠 안계시기도 했고, 장손으로 사랑받고 자란 덕분에 쓸데없이 자기애가 높기 때문이다. 내 삶은 누구도 챙겨주지 못하고 오로지 내게 달려있다. 언젠가 비행기를 탔을 때 안내음이 들렸다. 재난 시 반드시 자신의 구명조끼를 착용한 후 남을 도우라고. 그 조언은 내 격언이 되었다. 


 내 능력은 내 행동에 달렸고, 행동은 내 기분과 의지에 달려있다. 그래서 난 그 무엇보다 구명조끼를 껴 입듯 내 기분과 의지를 다독이는데 힘을 쏟는다. 기분이 상할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았고, 노력해서 손해만 볼 것 같은 건 거절했다. 단지 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상처 입은 심리가 연쇄반응을 일으켜 내 행동과 능력에 영향을 끼칠 것 같아서.



 늘 초연한 표정으로 어떤 상황이든 담담하게 말하는 편이다. 


 그리고 내 일이 아닌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사람들은 그 모습이 이기적이라고 말하기도, 묵묵해 보인다고 말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난 꽤 연약하고 간사한 편이다. 초등학생 때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 꽤 당황했었다. 당시에는 내가 먼저 말을 건넨다는 건 무척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서. 그래서 늘 혼자 밥을 먹고 하교했다. 간간히 생긴 친구들은 학년이 지날수록 멀어졌고 난 어느새 이상한 사차원 아이가 되어버렸다. 왜소하고 마른 체격의 말없는 꼬마로 중학생을 지낸 뒤, 간신히 고등학생이 되어 모의고사 성적과 원치 않는 축구로 친구를 가지게 되었다. 친구들의 실없는 농담에 잠을 이루지 못해도 티를 내지 못했고 별 것 아닌 것에 몰래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날이면 자학개그로 그들을 웃기려 노력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내 무난한 외모 덕분에 자주 말을 걸었고, 늘 습관처럼 쌓고 다듬은 작업물 덕분에 초등학생 때부터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게 되었다. 어느새 나는 친구들에게 조언도 하고 당당한 농담도 부리게 되었고 이상한 아이에서 독특한 친구가 되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외모를 꾸미고 일을 잘하는데 신경을 썼고 그동안 어느새 연약함을 잊어버렸다.




 오늘도 카페에 앉아 글을 쓰려고 맥북에어를 켰다. 


 글은 집에서도 쓸 수 있지만, 의지가 생겨나지 않는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카페에 앉아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끔 날 쳐다보는 게 좋다. 그럴 때면 왠지 어려운 대화를 하지 않아도 그들 속에 내가 함께 있는 기분이며, 세상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좋다. 그들 곁에서 나 역시 이곳에서 각자 할 일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지금, 시끄러운 카페 안에서 나는 할 일을 잃고 가만히 꺼진 노트북을 바라보게 되었다. 


 사람들로 꽉 찬 이 넓은 카페 안에서 노트북만 뚫어져라 보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문득 집에 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또 스스로가 의지가 부족하고 연약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나는 억지로 글을 썼다. 쓰다 보니 점점 글감이 차오르고, 어느새 5시간 동안 두 편의 일기를 써 내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도 매 순간 연약함과 강인함 사이를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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