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일을 하고 잠을 잤고 꿈을 꿨다. 요새는 꿈을 잘 꾸지 않는다.
오늘, 어김없이 6시 알람에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잤다. 휴가니까.
무려 8년 전, 회사원이 된 첫날부터 기상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큰 결심으로 설정한 7시 30분 알람. 몇 년 후엔 7시, 작년엔 6시 30분이 되었다가 지금은 6시가 되었다. 내년엔 5시 30분이 될지 모른다. 그만큼 잠드는 시간도 당겨졌다. 스물다섯에는 새벽 두 시에 한숨 쉬며, 내일 지각할까 걱정했었는데, 이제는 11시쯤 수면 알람이 울리면 침대에 누워 동물 다큐멘터리 같은 영상을 틀어놓고는 잠을 청한다. (모자란 잠은 주말에 비축한다.)
과거로 돌아가서, 19살에는 독서실에서 새벽 한두 시쯤 집에 돌아와 곧바로 서너 시간을 잤다. (모자란 잠은 수업시간에 비축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돈을 주는 것도 아닌데,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패턴을 살았었는지 새삼 놀라웠다. 물론 독서실 책상에 침 흘리며 잠을 잤던 게 한두 번은 아니었고 그때마다 무거운 자괴감에 시달리곤 했다.
대학생 때 처음으로 가위를 겪은 적 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홍대 골목 안으로 조금만 들어서면 고요한 하숙집들이 꽤 많다. 새벽, 과제를 끝내고 반지하 방에 들어가 미처 불을 끄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러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곧 누군가 내게 다가와선 귓가에 대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깜짝 놀란 채 겨우 몸을 움직여 잠에서 깨었다. 그날부터 밤이 무서워질 때가 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악몽을 꿀 징후가 느껴진다던지, 밤에 본 영화가 너무 잔인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거실에 조명등을 켜 둔 채 잠에 든다. 물론 그럼에도 누군가 내게 혼자 잠을 자면 무섭지 않냐 물어본다면,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반대로 즐거운 꿈도 있다.
인상 깊은 영화를 보다 잠이 들 때면, 꼭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다음 이야기를 그려나갈 때도 있었고, 자각몽처럼 가끔 이곳이 꿈이란 걸 깨달으면 비행을 즐기다 추락하는 몸의 감각을 견뎌보기도 했다. 또, 의미를 알 수 없는 꿈도 있다. 물론 꿈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알 듯 말 듯 의미심장한 말과 풍경이 펼쳐진 꿈을 꾸고 나면, 한동한 여운을 겪는다. 그러다 그 내용이 꽤 독특한 소재이고, 기록해보자는 생각에 미칠 때면, 기억나는 이미지를 단어 몇 개로 노트에 적어두곤 했다. 몇 년 전부터 소설을 쓰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꿈이란, 또 이상하게도 다의어로 바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꿈은 애틋하고 허무해진다. 꿈은 내가 아는 범위에서만 일어나니까.
고등학생인 나는 수능이 세상의 전부였고 내 모든 시간과 열정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좋은 대학교를 가지 않으면 좋은 인생을 살 수 없다고 배워서, 매달 치르는 시험이 절망과 행복의 잣대였다. 우리는 성적으로 보이지 않는 계급을 나눴고 비슷한 무리들과 어울리고, 동경하는 무리들과 친해지려 노력하기도 했다. 그건 우정이라고 했지만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집단이기도 했다.
대학생인 나는 취업이 세상의 전부였고 또 내 모든 시간과 열정은 모두 그곳에 있었다. 그래서 늘 학교 앞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켠 채 작업에 몰두했고 포트폴리오를 다듬었다. 그런 행위들이 내게 바른 길로 가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이곳에서도 우리는 수상경력과 워크숍 등으로 보이지 않는 계급을 나눠 비슷한 무리들과 어울리고 동경하는 선배들과 친해지려 노력했다. 그 와중에 연락하는 고등학교 친구들은 두 손으로 펼쳐 보일 수 있을 정도로 몇 남지 않았다.
이제 회사원인 나는 마땅히 세상의 전부라고 할 것이 없다. 늘 남들보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고, 가끔은 밤을 새우는 나날이 있지만, 돌이켜보면 단지 주어진 과제가 많고, 그저 남들보다 센 자존심, 책임져야 한다는 사고방식 때문일 뿐. 그 노력한 나날들이 과거처럼 또 한 번 나를 동경하는 어떤 곳에 데려가 줄 기미는 없다. 내가 다닐 수 있는 회사는 몇 없고, 굳이 다른 회사를 다닐 이유도 없다. 매년 더 높은 점수를 받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다. 어느새 남은 대학교 친구들은 이제 한 손으로 펼쳐 보일 수 있고, 휴가 중인 지금 수많은 회사 동료에게 연락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어쩌면 나는 무리에서 잠깐 길을 잃은 양일 수도, 아니면 새로 놓인 외나무다리 앞에서 멈춘 행렬 속 하나일지도 모른다.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높고 깊다. 그리고 다양한 길이 있었고 가늠할 수 없이 길게 이어졌다.
저번 주까지 밤을 새우며 더 좋은 디자인이 나오길 갈망했다. 새벽, 택시 안에서 아이디어를 끄적이고 샤워를 하며 내일 일정을 되새기며 밥을 급히 먹고 나서는 바로 모니터를 켜고 작업했다. 스물둘에는 대학교 옥상 희미한 조명등 아래에서 스프레이가 마르길 기다리며 뜨는 해를 바라보았다. 열아홉에는 집에 돌아가는 새벽 길이 무서워 가로등 빛 아래에서 연신 뒤를 돌아보곤 했다. 행위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꿈이 있었고 묵묵한 당연함으로 해왔을 뿐이다. 나는 늘 일을 하고 잠을 잤고 꿈을 꿨다. 요새는 꿈을 잘 꾸지 않는다.
누군가는 꿈을 꾸지 않는 것이 숙면이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꿈을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든 우리의 생체는 늘 꿈을 꾼다고 말했다. 생체는 늘 변함없이 숨을 쉬고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