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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Sep 23. 2020

오늘, 녹차의 모순

녹차는 치아 착색을 유발하지만, 충치 예방에는 좋다고 했다.

 긴 휴가를 맞아 치과에 갔다. 예약하는 게 귀찮아서 결국 프론트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 며칠 전까지 격무에 시달린 때문인지 습관처럼 핀터레스트에서 디자인 이미지를 뒤척이다 문득 가방 속에 책 한 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실격. 몇 년 전 소개팅에서 누군가가 권해준 책이다. 문득 그 여자 근황이 궁금해져서 카톡을 검색했다. 어느새 애기 엄마가 되어 있었다. 문득 내 나이가 몇인지 헷갈렸다. 서른셋. 곧 서른넷이 될 예정이다. 친구들을 만나면 모두 주식과 부동산 얘기를 한다. 나는 물론 아직 면허도 따지 못했다.




 최근에 치아가 급격히 까매졌다. 알고 보니 언젠가부터 물 대신 마시기 시작한 녹차 때문이었다. 평소에 치과를 갈 일이 거의 없어서, 생애 두 번째 스케일링을 받았다. 치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하얗게 변했다. 네이버에 녹차를 검색했다. 치아 착색의 주원인이지만, 충치에 좋다고 했다. 그래서 자주 마시고 대신 물로 입안을 꼭 헹궈야 한다고. 딱히 양치질을 열심히 하진 않지만 충치가 없는 것도 어쩌면 녹차 때문이다. 나는 이상한 모순에 빠진 느낌을 받았다. 냉장고 안 가득 쌓인 녹차 페트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것은 모순의 음료라고.




 긴 휴가임에도 나는 마땅히 할 것이 없어서, 카페를 가서 글을 쓰곤 했다. 새로운 글을 쓰기보단 이미 쓴 글의 문장을 다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주로 쓸데없는 분량을 잘라내곤 한다. 이것도 말하고 싶고 저것도 기록하고 싶지만, 알다시피 글이란 분제 하듯 잘라낼수록 더 깔끔해진다. 


 모순이다. 기억을 잘라낼수록 더 깊은 기록이 된다는 것.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버려서, 문장을 지우면 기억 속에서도 사라질 텐데. 나는 앞선 일기에서 글의 흐름을 위해 몇 년 전 필라테스 학원을 등록하기까지 몇 번이나 다른 학원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내용을 지웠고, 그래서 나는 아무 문제없이 학원을 다닌 게 되었다. 중요한 내용이 아니니까. 일기는 점점 변형되고 있다. 더 진실된 기록이 되기 위해서.




 날씨가 좋아서 카페테라스에 앉았다. 맨투맨 티와 반바지를 입고 있다. 그래서 종아리에 연신 바람이 밀려든다. 기분이 좋다. 한참 글을 쓰다 보니 해가 낮아지고 주위가 추워졌다. 그럼에도 나는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자 테라스에 계속 앉아있기로 했다. 지금은 추위 때문에 테라스에 앉아있기가 싫다. 그리고 테라스에 앉아 있어서 기분이 안 좋아졌다. 이것 역시 모순 아닐까. 어쩌면 지금 난 녹차의 모순에 갇혀버린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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