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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Jul 25. 2020

오늘, 가볍게 말했던 것들과 무거운 양심의 기로

또 한 번 양심의 기로에 섰다. 일요일, 일을 할지 아니면 그냥 쉴지.

 언젠가 아침, 마을버스정류장 옆 덩그러니 세워진 간판을 보았다. 필라테스 남성반을 모집한다고. 


 몇 년 전에 필라테스를 다닌 적이 있다. 당시에는 자율출근제나 주40시간 업무규정도 없었다. 늘 야근을 했고, 허리가 망가지고 말았다. 재활을 위한 스트레칭 수업을 받고 싶었다. 빠진 날이 대부분이지만, 일 년 정도를 다녔고 덕분에 지금까지 더는 허리가 아프지 않다. 하지만 여자들 가득한 공간에서 수업을 받는다는 게 생각보다 꽤 부담스러워서 결국 그만두게 되었다. 대신 회사 헬스장에서 가끔씩 러닝머신 위를 달렸다. 그러나 지금, 헬스장은 닫힌 지 오래. 덜컥 로잉머신을 집에 들이기도 했지만 쓰지 않는다. 


 회사에서 운동 관련 얘기가 나올 때면, 나는 필라테스 남성반이 있다면 꼭 다닐 거라고 말했었다. 몸을 키우기보다는 건강을 위한 스트레칭이 좋다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나는 양심의 기로에 섰다. 


 버스 정류장 옆, 남자회원 모집 광고를 못 본 척할지, 아니면 학원으로 들어설지.




 몇 주 전부터 회사에서 쉴 틈 없이 아이디어를 쏟아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물론 아이데이션을 무척 좋아하고 자부심도 있다. 하지만 시간을 분할해 여러 이슈들에 대한 해결책을 내는 일은 꽤 힘이 든다. 낯선 제품을 리뷰와 매뉴얼, 영상을 보며 파악하고 시장환경, 소비자, 경쟁사, 기술을 간파해야 한다. 머릿속에 개념이 정립되고, 그제야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풀어낼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방향성은 정답이라기보다, 이제 수십 개의 아이데이션을 쏟아내고 수정할 출발점이다. 


 예전에는 완벽해 보이는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긴 시간 고민했지만, 지금은 우선 뿌려내고 본다. 연차가 꽤 쌓였고 그만큼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다. 중간의 부끄러움보다 빈 결과물이 더 두렵다. 손 스케치를 하지도 않고 종이에 도식이나 글을 쓰지도 않는다. 파워포인트가 내 메모장이며 스케치북이다. 사람들은 스타일러스 펜으로 번뜩 떠오른 시안을 그려내는 디자이너의 모습을 상상하지만, 실제로 나는 도형 아이콘을 파워포인트 화면에 덧붙여 형상을 만든다. 어차피 나중에 3D 프로그램으로 다시 그릴 테고(마우스와 키보드로), 설명하는 건 핀터레스트 이미지가 더 효과적이니까. 그렇게 모든 번거로움을 제거하고 공장처럼 아이디어를 찍어내는 게 현재 디자이너의 삶이다.


 늘 사람들에게 말하곤 했다. 이곳은 내 천직이며 아이데이션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그래서 지금 서너 개의 프로젝트를 두고 또 한 번 나는 양심의 기로에 섰다. 항복할 것인지, 행복할 것인지.




 평일 내내 시간을 쪼개며 아이디어만 짰다. 셔틀버스 막차 시간이 다가오면, 나는 뿌옇게 바랜 두뇌를 들고 셔틀버스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기분을 정돈한다. 집에 돌아와선 샤워 후 말끔한 기분으로 주광색 조명등을 켜고 잠들기 전까지 소파에 누워 핀터레스트를 뒤척인다. 내일 아침 모니터를 켜자마자 진행할 아이디어가 생각날 때까지. 선배는 너무 쉽게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 아니냐며 놀렸다. 정말 감탄하기보다는 고민 없이 막 찍어낸 아이디어들이란 뜻 같다. 나는 괜히 더 아이디어를 짜는 게 재밌다고 말했다.


 금요일 오후, 짧은 시간에 아이디어를 많이 준비하지 못했다 말했다. 그리고 주말에 더 생각해서 월요일 오전에 보여드리겠다 말했다. 왜 주말에 일을 하냐는 말에, 나는 일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 양심의 기로에 섰다. 


 지금은 아늑한 토요일 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내일 카페에 가서 아이디어를 짤지, 아니면 몸이 외치는 대로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낼지.




 오늘 오후 1시에 설레는 마음으로 필라테스 학원을 향했다.


 몇 년 만인지. 필라테스는 무척 힘들었다. 중간에는 진심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다리는 볼품없이 경련하는 중이고 흘린 땀은 쏟은 물컵처럼 바닥에 흥건했다. 그럼에도 결국 수업은 끝이 났다. 계단을 내려가는 게 무척 힘들다. 눈 앞에 횡단보도 등이 깜박이는데 뛰어갈 수가 없다. 골목에 들어선 스타벅스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집을 향해 골목을 거니는 동안, 나는 알 수 없는 평온함에 도취되었다. 


 그동안 가볍게 말했던 것들과 무거운 양심의 기로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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