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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Sep 29. 2020

오늘, 축가와 마스크

글을 쓰는 동안 박재범의 '몸매' 가사를 잘 몰라 네이버에 검색했다.

 오늘, 일요일 오후. 친구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스타일러에 걸어둔 정장을 꺼내 입었다. 8년 전에 신입사원 워크숍 때 입으려 엄마와 함께 샀던 정장이다. 당시에 내가 원하던 더블브레스트는 넓은 매장에 단 하나밖에 없었고 그 이후에는 잘 입지 않았다. 원버튼 슬림핏이 대세였기도 했고 넓은 바지 품이 아저씨 같아서. 그런데 요새는 그 정장만 꺼내 입는다. 버렸으면 아쉬울 뻔했다. 흰색 셔츠와 함께 입으려다 더울 것 같아서 흰색 반팔티와 컨버스를 신고 밖을 나섰다.




 남산에 도착해 잊고 있던 예비군 훈련장이 떠오르는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동안 간간히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한 후 어색함을 피해 각자 친구 무리들로 황급히 돌아갔다. 들어차는 햇살 아래로 야외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모두의 박수와 함께 누군가 축가를 불러주었는데, 긴장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내색하지 않고 평온한 미소로 감상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곁에 선 친구에게 넌지시 말했다. 너는 다음에 결혼하게 되면 꼭 축가를 불러주는 사람을 잘 고르라고. 우리는 마스크로 표정을 가린 채 몰래 킥킥대었다.


 다음 차례로 또 한 번의 축가가 있었다. 사회자는 특별한 무대라고 했다. 나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남자 한 명이 흰 셔츠에 선글라스를 쓴 채 요새 유행하는 감미로운 노래를 불렀다. 제스처와 추임이 꽤 자신감 있어 보여서 우리는 가수일까 추측했지만, 조금 더 노래를 들어보니 그냥 또 하나의 고등학교 친구일 거라 단정했다.


 갑자기 비트가 울리기 시작했다. 분명 사회자는 특별한 무대라고 했었고, 노래는 알고 보니 박재범의 '몸매'였다. 그리고 남자 한 명이 더 뛰쳐나와 무대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또 한 번 담담한 말투로 친구에게 말했다. 너는 다음에 결혼하게 되면 꼭 축가를 잘 고르라고. 어느새 신랑 손에 마이크가 쥐어져 있었다. 그들은 함께 몇 분간 강강술래 하듯 신부를 둘러싸고 조금 글로 쓰기 그런 가사들을 크게 외쳤다. 나는 황급히 앞자리에 앉은 어르신들의 표정을 보았지만, 마스크를 쓴 그들은 여전히 박수를 치시는 중이다.


 친구는 이 광경이 지금 인스타그램 라이브로 송출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걸 식장 안 제한 인원 100명만 보는 게 아니었냐 말했지만, 친구는 지금 노래를 부르는 신랑의 표정이 꽤 만족스러워 보인다고 말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다 가사를 까먹은 듯 멈춰 서기도 했고, 제스처가 점점 의기소침해졌다가 다시 힘을 내 강렬해지도 했다. 친구는 신랑 신부와 축가를 불러준 친구들이 서로 친하니까 다 같이 기획한 것일 거라 말했다. 하긴 이게 상의 없는 깜짝 이벤트일 순 없을 거라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그들 나름의 계획과 코드가 있을 텐데, 너무 내 수준으로 생각했던 것에 반성했다. 그들이 좋다면 좋은 것이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한남동 거리를 걸으며 길을 걷는 동안 서로 근황을 말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일 년 만에 만났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자 친구가 없어졌다는 친구 한 명은 앞으로 우리와 함께 가끔 열리는 조조영화+점심 모임에 합류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꽤 즐거웠다.


 식장에서 점심을 주는 줄 알고 오전 내내 쫄쫄 굶었던 배고픈 친구 한 명과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었고 먹다 보니 맥주를 시켜 간단한 낮술을 하고 헤어졌다. 요새는 낮 약속을 잡는 편이다. 만나는 시간도 줄어든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아니면 세상이 바뀌어서일까. 나쁘지는 않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른 저녁에 헤어진 세명의 우리들은 남은 밤의 시간 동안 각자 뭘 하고 지낼까 하고.


 ps. 글을 쓰는 동안 박재범의 '몸매' 가사를  몰라 네이버에 검색했다. 그런데 성인인증을 하라고 해서    충격을 먹었다. 카페에서 성인인증을 하는 건 좀 그래서 페이지를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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