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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Sep 29. 2020

오늘, 화가들 속의 디자이너

이모는 몇 번이나 그들에게 나를 시각디자인과라 소개했다. 산업디자인과인데

 오늘, 월요일 오전 10시에 집을 나와 합정역으로 향했다. 엄마 친구분에게 3d 렌더링을 가르쳐주러 헤이리 예술마을로 가는 길이다. 2200번 버스를 탔다. 이층 버스지만 1층 버스 맨 앞자리가 비어있었다. 얼른 앉고는 안전벨트를 맸다. 버스 앞자리를 좋아한다. 스마트폰을 가방에 집어넣고 트인 차로를 바라보는 게 좋다.


 버스는 정류장 없이 한참 동안 운행했다. 그래서 혹시 이어폰을 껴서 정류장 안내음을 못 듣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다. 앱을 켜 위치를 확인할까 생각했지만, 어차피 목적지까지 한참이나 남았고 음악을 들으며 평온히 길을 가는 지금의 여정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 길을 가는 동안 팻말에 공항 가는 길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몇 달 전 회사 동료 소개로 소개팅을 했었던 승무원에게서 받았던 예의 바른 장문의 거절 카톡과 김포공항 근처 마곡에 있는 회사 건물이 생각났다. 거기 아파트 값이 뛰었다던데. 그러다 고생했던 최근의 해외출장이 생각났고 코로나 사태로 하게 될 재택근무에 필요한 윈도우 노트북을 사야 할까. 다음 주 출근하면 어워드 출품 준비부터 해야겠지. 샘플 신청은 언제쯤 해야 할까 등 무작위로 떠오르는 것들을 마주하며 길을 갔다.




 하마터면 목적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내릴 뻔했는데, 마침 전화를 한 그 이모 덕분에 제대로 내렸다. 같이 밥을 먹은 뒤 커피와 빵을 사들고 산책하듯 헤이리 예술마을로 들어섰다. 회사 야유회로 이곳에 와본 적은 있지만, 실제 이곳에 사는 화가들을 본 적은 없다. 이모 집 앞 맞은편에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 분이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조소과 선배님이라고 했다. 나도 홍대 미대생이라 말했고 이모는 내가 시각디자인과 출신이라 말해주었다. 나는 산업디자인과라고 정정해주었고, 그들은 예상대로 디자인과들은 싫다고 말해주었다. 구체적으로 왜 싫은지는 모르지만, 딱히 내게 의미 있지 않아 물어보지 않았다.


 집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학교 건물의 변천과정, 디자인과와 회화과의 사고방식의 차이점, 내 회사생활 등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이층으로 올라가 컴퓨터를 켰다. 이모는 차가 막히니 저녁 8시까지 있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누군가와 둘이 있는 시간 치고 너무 길다. 어서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프로그램이다. 딱히 도와줄 게 없었다. 나는 유튜브 영상을 보고 경험 상 내가 아는 프로그램과 비슷해 보이는 버튼과 옵션 이것저것을 눌러보며 간신히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작업 얘기도 하고 베이비부머, 밀레니얼, Z세대 등의 특성 그리고 요새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를 했다. 내가 글을 쓰는 얘기도 하고 소설 내용이랑 영감을 어디서 받았는지도 말했다. 이런저런 얘기들에 이모는 재미있어했고, 나 역시 재미있었으나 끝이 없는 대화에 불안해졌다. 오후 5시쯤 되자 이모 친구분이 방문했고, 나는 이제 마땅히 할 것이 없으니 집에 가겠다고 했다. 이모는 다 같이 오늘 사온 빵을 먹자고 했고, 그렇게 또 한 분의 회화과와 대화를 하게 되었다. 이모는 그분에게 내가 시각디자인과를 나왔다고 말했고, 나는 또 한 번 산업디자인과를 나왔다고 정정해주었다.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걸 좋아하는 편이라 그들과의 대화에 동질감을 느끼다가도, 나는 꽤 게으르고 불규칙한 편이라 예술가가 되었다면 삶이 꽤 피폐했을 거라 말했다. 그래서 회사가 날 조련하고 스케줄을 잡아주는 게 너무 좋다고. 그러자 그 친구분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예술가가 되었더라도 규칙적인 삶은 살았을 거라 말해주었다. 화가 중에서도 회사원처럼 정해진 시간 동안 작업하고 퇴근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 말에 내가 예술하는 사람들을 편협하게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이모는 그 친구분에게 내가 두 얼굴의 사람 같다고 말했다. 회사원의 나와, 회사 밖에서 글을 쓰는 내가 너무 다르다고. 사실 그렇진 않다. 두 가지 모두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정리하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진 않다. 어쩌면 내가 회화과를 나왔어도, 지금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모는 다음번엔 엄마와 함께 놀러 오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엄마와 전화를 했냐는 말에, 전화를 한지 꽤 오래되었다고 했다. 왜 연락하지 않느냐는 말에 카톡으로 연락한다고 말해주었다. 사실 엄마에게 연락하지 않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건이 없으면 연락하지 않는다. 그러다 방금 전편의 일기를 같이 간 친구에게 공유해주었고, 그것도 용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근 몇 달 만에 전화를 걸어 방금의 일기 내용을 공유해주게 되었다. 오랜만의 대화는 꽤 즐거웠고, 전화 후 추석맞이 용돈을 카카오로 입금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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