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늘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인환 Oct 31. 2020

오늘, 일기와 푸른 포카리스웨트

일기를 쓴다는 건 꽤 힘든 일이다. 쓰고 난 뒤에는 기억이 달라지니까.

 글을 쓰지 않은 근 한 달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쓸 이야기들이 참 많기도 하지만, 그만큼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없던 건 아니고, 그 소소한 일들 때문에 매일 밤 생각과 감정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사실 일기를 쓴다는 건 꽤 힘든 일이다. 그날의 감정을 떠올리고 행적을 분석해 의미를 찾아내야 하니까. 하나의 일기에 2-3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내 머릿속은 백지가 된다.


 가끔은 문맥의 중턱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낼 때가 있다. 가볍게 지나쳤던 사건이 그날을 설명하는 첫 페이지가 된다. 그런 것은 계획할 수도 예상할 수도 없다. 막상 글을 쓰기 전까지는. 그래서 또 일기를 쓴다는 건 꽤 힘든 일이다. 쓰기 전과, 쓰고 난 다음의 기억이 달라지니까. 그리고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어제부터 갑자기 짙은 푸른색 상의를 사고 싶었다. 스무 살 시절에는 파란색의 옷이 계절 별로 몇 벌씩 있었다. 그때는 앳되어서 색이 잘 맞기도 했지만 그보다 푸른색의 차가움을 동경했다. 감정에 휩쓸려 밤을 지새우는 게 힘들어서 차라리 깡통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느 새벽. 파란색의 포카리스웨트 캔이 차 바뀌에 깔려 찌그려진 걸 보았다. 한겨울 푸른색의 포카리스웨트. 그만큼의 푸른 사람이 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삶은 버려진 깡통 같은 최후를 맞지 않을까. 그래서 포카리스웨트는 바람에 굴러가는 철제음으로 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냐 다그쳤다. 지금 나는 그때 바랬던 모습과 꽤 근접한 사람이 되어버렸고, 굳어진 습관과 언행 탓에 되돌리긴 어려워 보인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버려진 깡통처럼 되묻고 싶다.


 어제 열차에서 우연히 어떤 남자를 보았다. 안경을 쓴 마른 남자는 역방향으로 앉은 나와 좌석 하나를 세워두고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평소 내가 동경했던 모습. 매섭고 차가운 눈빛을 한 그는 단정한 머리와 정장을 차려입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말투가 정중하며 건조했다. 그의 표정마다 드러나는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주변의 사람들을 불편해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비칠 자신의 모습을 신경 쓰고 있는 중이다. 그는 가방에서 안대를 끼고 잠을 청하다가 괜히 좌석에 걸린 잡지를 꺼내 읽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꼈다. 어쩌면 어제 난 미래의 예시를 본 것일지 모른다. 마치 푸른색의 빈 깡통이 내게 보여주려 했던 것처럼. 그 소감으로는 못나진 않지만 재수가 없어서 그다지 친해지고 싶지 않다.




 오늘, 푸른색 상의를 사려고 늦은 오후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에 들렀지만 원하는 색의 옷이 없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언젠가 그런 옷을 사야겠다 미루고는 매장을 나섰다. 그 날이 겨울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내년 가을이 될 수도 있다. 아니면 너무 오랜 뒤에 그런 옷을 발견하게 되어서, 그때는 이미 흥미를 잃어버린 뒤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나는 이미 몇 달 전에 그 옷을 보았는데, 무심코 지나쳤을 수 있다. 한 달 전만 해도 나는 녹색과 하늘색 그리고 베이지색의 옷을 고르고 있었으니까. 너무 무채색의 옷들만 가득해서 밝은 옷, 그리고 밝은 웃음을 내보여야겠다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매 순간, 갑자기 드는 생각과 기분에 따라 우리는 눈앞의 일들의 의미를 규정하나 보다. 우연은 가볍고, 굳어지는 생각은 무겁다. 인생 선배들이 결혼생활 얘기가 나올 때면 늘 하는 말이 있다. 인연은 타이밍이다. 누굴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느 시점에 만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돌이켜보면 인생 모든 것이 그렇고, 내 시점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그들의 시점은 예상조차 할 수 없고, 세상의 시점은 계속 나를 흔드는 중이다. 


 코로나 같은 건 상상도 못 했고, 초반에도 내가 마스크를 100개씩 구매할 것이란 걸, 그리고 최근에는 옷 색깔에 맞춰 흰색, 검정 두 가지 마스크를 쓰고 다닐 거란 걸 알지 못했고. 어제 기차에서 마스크 스트랩을 검색할 것도 몰랐다. 저번 주에 친구들과 등산을 갔던 것(다음에 한번 더 등산을 가면 종합해 일기를 쓸 예정이다.), 만년 막내인 내가 인턴들을 매주 봐주고 있단 것(이것도 종합해 다음으로 미룰 예정이다.), 그리고 어제 기차를 왕복으로 타고 돌아온 일.(다음 주에 쓸 예정이다.)


 이런 모든 일들이 갑작스레 다가왔고, 조금씩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동시에 나 역시 가변적인 마음으로 다가오는 일들을 그날 기분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웬만하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내 미래는 그 재수 없는 아저씨가 아닐지 모른다. 그래도 멋져 보이긴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늘, 낮잠과 접종 그리고 회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