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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홀러 류 씨 Jan 09. 2017

정년퇴직을 앞둔 프로 워홀러의 작은 심경 고백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 워킹홀리데이를 앞두고.

두 번째 워홀 국가였던 호주에서 '프로페셔널 워홀러'라는 별명을 얻더니 이젠 '정년퇴직을 앞둔'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이틀 후부터 시작될 마지막 워킹홀리데이를 앞두고 뭔가 기록해두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껴 마음 가짐도 좀 정리해 볼 겸 써본다. 언젠가 한 번쯤은 내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고. 의식의 흐름으로 쓰는 글이라 중구난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1) 가볍게 지난 워홀 이야기

-첫 워홀은 2007년 7월 6일에 떠난 일본 워홀이었다. 워홀 카페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던 장수생은 남 말이 아니었다, 내가 그 장수생이 될 줄이야. 나는 2005년부터 지원했던 나는 2006년 3분기에 5번째 지원(2006년부터 연 4회 선발, 2005년 상반기, 하반기, 2006년 1분기, 2분기, 총 4회 탈락. 심지어 나는 2005년 1분기에서 처음 떨어진 직후, 고3 수능 끝나고 앓았던 거식증이 다시 찾아와 한 달 내내 물도 못 마시고 움직이지도 못해, 결국 열흘 동안 입원해 있었다)으로 겨우 붙었다. 해외에서의 생활을 너무나도 갈망했기 때문에 가족, 친구들과의 헤어짐, 아쉬움보다는 새 인생에 대한 기대감,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던 것 같다. 그해 겨울에 대선이 있었다. 주변의 일본인들은 슬슬 워홀 기간 1년 중 반이나 지나가자 한국으로 돌아갈 거냐고 자주 물었고, 나는 대선 전부터 그가 대통령인 나라에선 단 하루도 살지 않겠다고 공표하고 다녔다. 마침 대선이 있었던 그다음 날인가가 일했던 가게의 송년회 모임이 있었는데, 나는 술잔을 들고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모두의 앞에서 발표했다. 사실 핑계 댈 수단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는 이미 그 짧은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이 생겼고 꿈을 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워홀의 1년이 지난 이후 전문학교로 진학하였으나 결국 현지 취업에 실패하여 4년 1개월 동안의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귀국은 311 대지진과 졸업 직후부터 몇 달 동안의 고민 끝에 힘겹게 내린 결정이었다. 썩어가는 고인 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실망, 311 대지진 이후 모든 것들로부터의 스트레스,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겪게 될 많은 문제들, 간다면 그만둔 대학으로 돌아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음향 일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해보고 여기마저도 안 되면 한국 돌아가자고 지원했던 회사에서 서류 불합격 통보를 받았고, 그때부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발견한 '한국-독일 워킹홀리데이 협정 체결' 소식. 이거다! 일본에 남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은 늘 49:51이었으나, 한-독 워홀 체결 소식은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쪽에 2%를 더해주었다. 그렇게 급하게 정리해서 귀국하고, 귀국 5일째 되는 날 13학기 휴학이 끝나고 3학년으로 대학생 생활을 시작했다.


-두 번째 워홀은 예상외로 독일이 아니라 호주였다. 독일이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일본 워홀을 준비하기 이전에 나는 독일 유학과 일본 유학을 고려한 적이 있다. 금전적인 이유와 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자기성찰로 유학은 내 팔자가 아니라며 워홀을 선택한 것이다. 독일에선 독일어도 배우고, 세금도 비싸니까 450유로 미만의 미니잡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중 몇몇이 워킹홀리데이로 호주에 다녀와 내게 적극 추천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워낙 팔랑귀라 '도대체 얼마나 좋길래?'라는 생각이 들더라. 하지만 호주 워홀은 지인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을 접하며 한 번 엎어졌고,  대학 졸업 후 독일 워홀을 준비하던 도중 한국에선 도저히 못 살겠다, 몰라 나 나갈 거야, 라며 뛰쳐나가다시피 호주로 떠났다.


즐거울 것만 같았던 나의 호주 생활은 도착 4주째 되던 날, 일하게 된 가게에서 뜨거운 기름이 내 손으로 흘러내려 화상을 입어 여름 내내 붕대를 감고 다녔고, 새해 둘째 날은 지갑을 분실하고, 만 30세 생일 기념으로 떠난 울루루 여행에선 카메라를 분실하였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상반기가 지나 하반기는 재밌게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찰나에 걷다가 넘어졌는데 한쪽 팔이 완전히 두 동강이 나버려 수술받고 2달 동안 아무것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남들은 호주 가서 돈 벌어온다는데, 2달 동안 모아놓은 돈도 다 써버린지 라 나는 가져간 돈보다도 더 적은 돈만 들고 올 수 있었다. '꿈만 같았던 시간이 아닌, 꿈이길 바랐던 시간'으로 총평을 내렸던 호주에서의 1년이었다.


-세 번째 워홀은 최종 목적지였던 독일이었다. 짧은 대만 생활을 한 후에 독일로 가서 유학 생활로 전환하여 독일 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최초의 계획이었는데, 호주 생활을 하며 중국어의 필요성을 느껴 일단 아시아로 돌아와 중국어를 배우기로 했다. 만약 유학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언어는 많이 알 수록 이득일 테니까.(이제 와서 밝히지만 전공은 역사이고, 저 위의 일본 유학 독일 유학에서부터 등장하는 유학하고 싶은 전공은 미술사-중에서도 건축사-다) 그렇게 시작한 독일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끝났다. 서양 문화권의 문화 차이는 이미 호주에서 겪어 어느 정도 익숙한 상태라 시각적으로도 피부로도 느껴지는 자극은 거의 없었다. 따뜻하고 밝았던 호주와는 다르게 독일의 쌀쌀한 날씨, 날씨와 꼭 닮은 사람들. 옆 나라 네덜란드, 프랑스만 가도 이렇게 찬 바람이 쌩쌩 부는 곳들은 아니던데 독일은 왜 이리도 살을 애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지. 건조한 날씨로 피부 질환, 비염은 점점 더 심해져가고, 내가 바랐던 라이프 스타일과도 괴리감이 있어 독일에서의 생활은 주변 국가 여행 외에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상과 기대가 컸던 만큼 불만족과 실망이 컸으며, 함께 일하는 일본인 한 명과의 트러블은 끝까지 해결되지 않았다. 독일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았겠지만, 독일에서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 마음속의 여유가 점점 사라져 갔다. 차라리 독일이 해외 생활의 첫 나라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좀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기엔 내겐 비교 대상이 너무 많았다. 정신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얻는 것이 많았던 일본, 호주 생활과는 다르게 얻기는커녕 계속 내 안에 있던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어 독일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애초에 독일 잔류가 아닌 대만 워홀은 반드시 간다고 정했기 때문에 귀국을 두 달 앞당긴 것뿐이라, 주변 사람들이 하던 남을까 돌아갈까의 고민은 없었다. SNS로 나의 근황을 접하던 주변 사람들이 호주는 다사다난했지만 그래도 즐거워 보였는데, 독일 생활은 힘들어하는 게 보였다며, 얘한테 안 맞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긴 하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내게 털어놓더라.



2) 워킹홀리데이, 너의 의미

-내게는 워킹홀리데이는 '해외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유학 비자 발급에 비해 무척이나 낮은 금액의 잔고증명(나라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유학비자는 3~4천만 원, 워홀 비자(이탈리아 제외)는 보통 200~250만 원)이 가장 큰 매력이고, 가서 일을 하든 여행을 하든 공부를 하든 자유롭다는 것이 두 번째 매력이자 내가 워킹홀리데이를 네 번이나 선택한 이유. 나는 가진 돈이 없어서+비자 발급이 까다롭지 않아서+뭘 하든 어디서 살든 자유로워서.


-워홀은 성공과 실패가 존재하고, 반드시 무언가를 얻어야만 하는 걸까? 얻지 못할 시간이라면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는 걸까? 성공도 실패도 기준이 없는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걸까.

다시 지난 세 번의 워홀을 되짚어보자. 일본 워홀은 하반기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유학으로 진로를 정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워킹 워킹 워킹'이었다. 호주 워홀은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사다난했고, 신체적으로 상처들도 입었고 목표로 했던 영어나 돈 벌기는 어느 하나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패했다는 생각은 안 한다. 평생 여행과는 인연이 없었는데 대자연으로 여행도 가보고, 여행 도중 잊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겼고, 조개와 치즈는 절대 입에도 대지 않았던 내가 타즈매니아 섬의 한 투어를 통해 치즈와 석화에 심지어 못 마시던 와인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커피는 못 마신다고 하더니 커피 도시 멜버른에서 커피도 엄청 많이 마시러 다니고, 먹어 보지 못했던 다양한 나라의 음식들도 접하게 되었다. '꿈만 같았던 시간이 아닌 꿈이길 바랐던 시간'이라고 총평하지만, 그 작은 시간의 조각들은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거진 다 느끼며 살아본 시간이었다.

독일 워홀도 더 이상은 싫다며 8개월 만에 뛰쳐나오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다시 돌아갈 가능성도 있고, 충분히 있을 만큼 있었다고 생각한다. 8개월의 시점에서 여동생의 결혼식이 있어 한국에 한 번은 돌아와야 했고, 다시 한 달 반~두 달을 위해 굳이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못 느껴 돌아가지 않기로 했을 뿐이지, 여동생의 결혼식이 그 시점에 없었다면 나는 오기로라도 있을 수 있는 만큼의 개월 수는 다 채웠을 것 같다. 스트레스는 많이 받았겠지만. 처음 가본 유럽이었고, 독일에 간 덕분에 인근 주변 국가인 네덜란드,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에도 다녀왔다. 독일 같은 경우엔 처음 가져간 돈은 그대로 가져왔으니,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었다. 역시 호주와 마찬가지로 일본어라는 편함에 기대 버려 현지어가 늘지 않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공부하려면 했겠지, 그건 나의 게으름과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워킹홀리데이라는 제도가 다른 이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른다. 종종 스펙의 한 줄이 되기도 하고, 가면 서비스업 할 건데 언어도 안 늘어오고, 시간 낭비라 불리기도 하고. 확고한 목적과 목표가 없는 워홀은 실패한다고 한다. 나의 지난 세 번의 워홀은 성공했을까? 애초에 워홀을 떠나 이루고자 한, 달성하고자 한 명확한 목표들이 없기 때문에 내겐 성공이니 실패니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 무엇보다도 나의 시간들에 성공과 실패라는 딱지를 붙이고 싶지 않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후 3년 반이라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다. 무척 힘든 시간으로 기억한다. 사람들의 편견과 곱지 않은 시선, 오지랖과 싸워야 했고, 이렇게 사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것이 뼈에 사무치게 외로웠다. 하고 싶은 것을 바라보고 달려왔던 일본 유학 시절과는 다르게 하고 싶은 일도 목표도 없다는 것은 내게 큰 박탈감과 상실감을 주었다. 눈을 떠도 감아도 내 눈 앞이, 나의 앞 날이 너무나도 깜깜해 살아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고, 자신만만했던 나는 어느새 너무나도 작아져 출발선 앞에서 겁만 먹고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고 느꼈다. 실제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기분이라고 고백하기도 했고. 독일 워홀을 마치고 대만 워홀을 준비하면서 나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여전히 눈 앞은 깜깜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의 어둠에는 익숙해져, 내가 가진 모든 감각으로 어둠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게 가능해졌다고. 더 이상 발만 동동 구르는 일 없이 일단 발을 떼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도전에 익숙해졌고, 도전 앞에서 나는 대담해졌다. 그동안 세 번이나 워킹홀리데이 생활을 하면서, 워홀을 통해 무엇을 얻었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나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여기저기 팔랑거리며 사는 것도 삶에 대한 자세에 따른 것 같다. 일본 유학 생활 시절엔 내겐 인생의 계획이 있었다. 취업해서, 1년 차엔 안마 의자를 사고, 3년 차쯤 되었을 때 결혼을 해서, 5년 차쯤 되었을 때 아이를 갖고, 그때 마스터링 쪽으로 옮겨서(일본에서의 전공이 음악 레코딩이다) 아침 출근 저녁 퇴근으로 살면 딱이네. 근데 인생이 그렇게 쉽게 생각했던 것대로, 노력한 대로 흘러가 주지 않았다.

취업 실패로 계획을 세워도 뜻대로 흘러가지도 않는다는 것과 학점, 자격증 등의 스펙에 불신이 생겼고, 2011년 3월 11일의 대지진으로 2년 동안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젠 인생 계획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지금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자. 이리저리 떠돌다 보면 언젠가 어딘가에 도달하겠지. 그때 가서 생각하자.' 3년 반, 20대 중후반의 나의 마인드였다. 그리고 현재에도 크게 변하진 않았다. 누군가는 불안해서 계획을 세워서 그에 맞춰간다면, 나는 그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불안하다.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데 뭘 믿고 계획을 세우는가.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때그때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함과 흔들리지 않는 강한 중심만 있으면 된다고 믿는다. (이런 사고방식이 여행 스타일에도 반영되는지, 내 여행은 늘 무계획 여행이다. 물론 장단점이 있다.)


-다시 해외 생활을 시작한, 호주 워홀을 시작했을 때엔 막연하고 뿌연 그림만 그려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한국에서 다니면서 대학을 다니면서 이 워홀 기간을 위해 여러 가지를 배워두었다. 2년 동안 화실을 다니며 수묵화를 배웠고, 학교에서 사진 수업과 글쓰기 수업을 수강했다. 워홀이 끝날 시점에 내가 찍은 사진들과 내가 그린 그림들과 내가 쓴 글들로 책을 한 권 내고 싶다는 마음에 시작한 일들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렇게 배워온 것들로 다른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대만 워홀이 끝나고 그 이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나도 모르겠지만, 어떤 삶이 되든 기대가 된다.


-뭔가 거창하게 쓰고 싶었는데 그나마 좁쌀만큼 있던 작은 글재주마저 상실해 의식의 흐름밖에 쓰지 못한다.



3) 마지막 워홀에 앞서

-나의 시간에 성공이니 실패니 붙이고 싶지 않다고 잔뜩 써놨지만- 이번 대만 워홀은 지난 두 번의 워홀 생활을 되돌아보아 반성하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보았다. 일단 한국인도 일본인도 없는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중국어든 영어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일하는 거야 현지어를 아예 못하니 한국인, 일본인들과 일하게 될 테고, 거기서 배워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HSK 6급을 따겠어!!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다면 좋겠지만, 워낙 청개구리라서 목표 설정은 오히려 '하기 싫음'을 낳게 된다. 나는 게으르기 때문에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만 하는 게 내게 가장 효과적이다.


-어떤 시간으로 보내고 싶은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봤다. 일단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을 것. 이건 나를 떠나보내는 모든 이들의 소망이더라. '이번엔 제발!'이라고 할 정도. 개인적으로는 작은 목표가 하나 있는데, 이것은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쑥스러우니까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다. 대만 생활이 끝나면 그때 무엇이었는지 좀 당당하게 말하며 평가를 하고 싶다.


(아, 나는 85년 2월생이다. 한국 나이 33세, 현재 만 31세, 당장 다음 달에 만 32세.

설마 아직까지 이 긴 글을 보고도 어머 얘는 결혼은 언제 할 거고 아이는 언제 낳을 건데? 나이 더 먹으면 못 낳는다 등의 오지랖 성 걱정을 하는 사람은 없겠지. 여동생 느님의 명언을 빌리자면,

"소개나 시켜주고 그런 소리 하세요. 소개해 줄 거 아니면 신경 끄세요. 내가 알아서 해요.")



4) 워홀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나는 기본적으로 워킹홀리데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국가든 거의 무조건이라 할 정도로 추천한다. 가서 어떻게 삶이 변해서 올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삶의 변화와 그 계기를 원해서 워홀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추천. 시간 낭비는 아닐까라고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1년이라는 시간은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있다가 아니다 싶으면 돌아오면 된다. 단순히 안 맞는 것뿐이지 실패는 아니지 않은가. 해외 생활에 대한 동경과 미련을 끊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 물론 거기서 좋은 일이 생기든 나쁜 일이 생기든 발생하는 모든 일의 책임은 선택한 자신에게 있다.


-솔직히 말해서 워홀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운이 좋으면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이 서비스업에서 종사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두고 의미 있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 지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일명 '고학력 외노자 신세'가 되기도 하고. 솔직히 나도 해외에 나와서 서빙을 하든, 농장에서 과일을 따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의 삶에 직접적인 큰 도움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일본에서 지낼 때의 이야기를 하자면, 일본에선 취업할 때 한국 학생들은 쓸 데 없다며 안 한다는 동아리 활동, 아르바이트 경력을 꽤 쳐준다. 오히려 없으면 '얜 할 줄 아는 게 뭐야? 그동안 왜 아무것도 안 했어?' 이런 느낌. 같은 일이어도 한국에선 의미가 없고 일본에선 의미가 있고. 서로 다른 나라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본인 기준으로 하찮은 일이라도 얻어내는 것은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그리고 서비스업, 아무나 하는 일일 수도 있지만, 누구나 다 잘할 수 있진 않다. 무시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거, 아주 나쁜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서비스업 총경력이 2003년부터니까 13~14년이고, 그중 음식점만 만 6년이 넘었다. 그동안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봤는데(학생으로 보낸 시간이 길었으니 당연히 아르바이트 기간도 길다), 그중에서도 최고 레벨로 꼽는 것은 한국에서 2013년인가에 했던 '추석 대목 재래시장 떡집 단기 알바'. 아침 7시 반부터 저녁 10시 정도까지 20분 쉬었나? 검은 티셔츠가 하얗게 면하고 몸은 염전이 되어 얼굴에서 소금이 떨어질 정도의 (내 기준) 고난도 알바였다. 일 한 건 추석 전날과 당일, 이틀뿐이었지만, 나는 내게 그런 넉살이 있는 줄 몰랐다. 근처 상인분들과 그 떡집 분들도 도대체 뭐하던 사람이냐고 놀랄 정도. 이 이틀 간의 알바를 안 했더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내 장점인 줄도 모르고 살았겠지.


-취업이 미뤄진다거나,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재취업에 대한 고민을 하는 분들도 많은데, 일한 적 없는 내가 감히 주변 사람들을 보고 갖게 된 생각을 공유하자면... 워홀이 공백기로써 마이너스로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플러스도 될 거란 생각은 안 한다. 해외에서 사는 것, 해외에서 혼자 사는 것이 두려운 사람은 안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해외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있는 것이다.


-외국도 사람 사는 곳이다. 여기저기 살아보고 느낀 것 중 하나는,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이라 한국이랑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살든 나가서 살든 같다면, 굳이 한국에서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유리 천장, 차별 이런 것들 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모두 존재한다. 외국은 천국이 아니다. 또 다른 지옥일 수도 있고. 환상 갖지 말고 착각하지 말자.


-내가 변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사는 내가 부럽다, 대단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네가 더 대단하다고. 나는 가진 것이 없으니 잃을 게 없는 것뿐이라고. 나는 하고 싶은 것도 하기 싫은 것도 모두 참으며 살아가는 이들이 부럽고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며 살든, 그것은 각자의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그렇게 믿을 수 있는 선택을 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끝.

내가 읽어도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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