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워홀러 류 씨 Mar 05. 2017

타이베이 기록

2017년 3월 5일, 갑자기 쓰고 싶어서 써보는 첫 기록.

아까 저녁 먹고 집 앞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때만 해도 뭔가 끄느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충만했는데 잠시 인터넷 서핑하는 사이에 또 사라져 버렸다. 에라이. 괜히 일주일에 하나씩 기록을 남기겠다고 일을 벌여놓은 것 같다. 의무감이 생기면 아예 안 하게 되기 때문에(망할 이 청개구리 성격..) 마지막 주인 50호까지 채울 수 있도록 하고 싶을 때만 하려고 했더니 의외로 쉽게 의무감에 압박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내가 올리고 싶을 때 올리는 걸로.



오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병원에 다녀왔다. 병원 근처라고 하기엔 걸어서 20분은 걸리는 곳의, 일부러 찾아간 소롱포집의 소롱포는 너무 기름을 과다하게 넣어 느끼하기 그지없었고, 눈 앞에서 놓친 버스는 3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집 근처의 세븐일레븐에 들러 주문한 택배를 픽업했다. 대만 드라마 <아가능불회애니>의 DVD와 대본집을 주문해보았다. 대만에서의 첫 인터넷 쇼핑. 중국어는 모르지만 한자로 어림잡기+일단 하고 보는 실행력으로 무사히 성공한 것 같다.

반복해서 보다 보면 문장과 단어들이 눈에 익지 않을까+열 달 후에는 한글 자막 없이, 중문 자막으로라도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는 바람이 있다. 노력을 해야 되든 말든 하지. 꼭 나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이상만 높은 인간들이 해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마음 같아선 달달 외우고 싶다.



어떻게 일본어를 익혔었지-를 떠올려보고 그대로 혹은 변형해서 다른 언어 습득에도 적용한다면 될 것 같은데, 그러기에 난 너무 게으르다. 공부하는 걸 너무 싫어한다. 이런 데 무슨 공부를 또 하겠다고 유학을 가겠다고. 책상에 앉아있는 것도 싫어하고 침대에서도 휴대폰 만지는 걸 제일 좋아한다. 이러니 양손 엄지손가락 근육에 문제가 생기지.


한국에서 다시 학교를 다닐 시절, 학교의 한국어 교육 기관에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학생들에게 1:1로 멘토 활동을 하는 '한국어 도우미'를 방학 포함해서 5학기 동안 했다. 그중 세 명은 한글부터 시작하는 초급 일본인이었는데, 그땐 아직 일본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되었을 때라 한국어보단 일본어가 아직 더 편했고, 학교에 아는 사람들도 없던 터라 정말 열심히 했다. 덕분에 나는 학생들의 강력하고 적극적인(본인들 말로는) 추천과 성실한 활동 기록으로 1회 최우수 도우미상, 2회 우수 도우미상(최우수는 한 번 밖에 안 준다고..)을 받았고, 학생들도 모두 최소 우수 학생상을 받았다.

그때 당시의 나는 뭐가 그리 잘났다고 외국어 학습 방법에 대해 그렇게 열변을 토하며 조언을 했던 것인가. 그때 했던 말들이 5년이 지난 지금 내 가슴에 부메랑이 되어 박힌다.  나도 실천하지 못할 일을 왜 남들에게 강요했는지. 물론 그들은 한국에 하던 일도 그만두고 시간은 물론 '학비'라는 큰돈을 써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으로 배워가야 했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도우미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는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내가 일본인들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나 역시 도와주고 싶었다.

머리로는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하지 않는다. 영어-독일어-이번엔 중국어. 이미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늘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게을리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절실하지도 않았고, 어학능력시험을 보겠다는 목표도 없어 동기도 부족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브런치에도 내가 어떻게 일본어를 익혔는지 쓸 예정이다. 근데 나는 따로 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통해 익힌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였기 때문에, 쓰게 될 글은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한국어 도우미 활동을 하면서 '내 담당 학생들에게 했던 조언(이란 이름의 구박)'이 될 것이다. 일본어 잘 하는 사람이야 널리고 널렸고, 나는 스스로 '네이티브'급이라고 칭할 정도로 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 일본어의 레벨을 이야기할 때엔 '유창함 fluent'이라고 답한다. 만 4년간의 일본 생활을 접은 지 만 6년이 되어가고, 지금은 거주 당시보다 어휘력, 문법 구사력, 문장의 완성도, 발음, 억양 등등이 1/100 이하로 떨어진 상태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아직은 fluent라고 대답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대로 하면 되는데 왜 안 하는 거니.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답 없는 인간이다.



대만 여행을 일본 여행의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사람도 많고, 때문에 일본스러움을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도 많고. 하지만 내가 본 대만은 일본과 전혀 다른 나라다. 나도 4년 전 일주일 동안 대만의 세 도시(타이베이, 타이중, 타이난)를 여행하면서 상당히 일본색이 많이 남은 나라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두 달이지만 막상 살아보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시간이 많으니 조금씩 풀어갈 예정.

개인적으로는 대만으로 여행 오는 한국인들의 여행지, 방문하는 음식점들이 너무 획일적이어서 아쉽다. 음식점이야 향신료 등 한국인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맛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너무나도 다들 똑같아서 무엇이 한국인들의 대만 여행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궁금해진다. 물론 답은 '꽃보다 할배'로 정해져 있다.



작은 섬나라 대만도 도시마다 기후가 다르니 '대만 날씨'라고 일반화해 부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내가 사는 '타이베이'의 날씨는 일단위의 온도 변화는 심한 편이지만 하루 안의 일교차는 심하지 않은 편이다. 하루 동안 최고기온과 최저기온의 차가 20도 넘게 날 때가 꽤 있었던 멜버른이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이곳은 일교차가 5도 안팎. 

일교차는 크지 않지만 추웠다 더웠다 하는 날씨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계속 따뜻한 음식을 먹어 체온을 유지하려 하게 된다. 국물이 있는 요리를 가장 선호한다. 한국의 국물 요리와는 다르게 맵거나 짜거나 하는 게 없어 자극적이지도 않다. 중화권은 여름에도 따뜻한 차를 마시는 문화라는 것이 단순히 찬 걸 먹는 게 안 좋다, 물이 좋지 않아 끓여먹는 것을 선호한다,라고 넘겨짚고 있었는데 내가 살아보니 자연스레 이해가 간다. 

대만은 더운 나라라 찬 음료도 같이 발달해있다. 나는 늘 얼음 빼서 주문한다. 뿌야오삥~ 취삥~ 얼음을 넣지 않는 것은 몸 생각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이가 시려서'다.



얼마 전에 벼르고 벼르다 무지(무지루시, 무인양품)에서 줄 없는 얇은 노트를 구입했다. 스탬프러리 노트로 사용할 예정이다.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여러 가지 머리 속으로는 구상했지만 그것들이 실현화될지는 미지수다. 난 게으르고 하고 싶을 때만 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행동 범위가 넓어지는 날은 꼬박 가지고 나가서 열심히 찍고 있다.



집 바로 앞의 공원. 아침에 와도 좋고 낮에 와도 좋고 오후에 와도 좋고 저녁에 와도 좋고.
대만 생활의 만족도가 가장 높아지는 순간은 바로 이 공원 벤치에 앉아있을 때다. 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은 '휴일+비 안 옴+안 추움+한 손엔 쩐쭈나이차'가 모두 갖춰졌을 때뿐이다. 만족도가 낮으래야 낮을 수가 없다. 

대만의 공원에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직 벌레들에게 공격당한 적이 없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여름엔 더위+습도+벌레=지옥이 따로 없단다. 이렇게 벤치에 앉아 있으면, 맥주 한 캔에 과자 한 봉지 뜯어놓고 수다 떨고 싶어 진다. 아쉽게도 대만은 내가 알기론 공공장소에서의 음주는 금지로 알고 있다. 크흑.... 이 순간만큼은 독일이 그리워진다.(백 번 욕하다 드디어 한 번 칭찬하는 독일)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음주가 허락된다고 해도 함께 이야기 나눌 사람이 없다. 흐흑...



대만 워킹홀리데이가 끝나면- 난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까. 한국 나이 서른넷, 미혼 여성, 업무 경력 없음. 설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겠어? 싶으면서도 정말 없을까 봐 두렵다. 취업을 해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여전히 없지만, 어떻게 굴러갈지 모르는 게 앞 일이니. 나의 앞날이 환경에 타의에 의해 굴러가지 않도록, 굴려도 내가 내 의지로 스스로 굴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큼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 내 마음도 내 머리만큼 겁 없이 돌진하는 스타일이면 좋을 텐데.

작가의 이전글 정년퇴직을 앞둔 프로 워홀러의 작은 심경 고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