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원 No50] 예술人기획人행정人 부족 간 인터뷰 프로젝트
오십번째 좌표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으로 가보았습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우리나라 공공조직에서 만화 진흥과 만화문화 확산을 목적으로 설립된 거의 유일한 기관입니다. 이름만 보면 문화부 유관기관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부천시 출연기관입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웹툰 분야를 지원하고 있지만, 문화예술진흥법에도 포함된 만화 장르에 한정해 보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 전시 기반의 만화박물관 운영, 만화 분야 창작 지원, 만화 IP 산업화 유통 등을 지원하면서 전국 만화 산업 진흥의 중심축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2022년 전국학생만화공모전 수상작 중 하나로 고등학생 만평 "윤석열차" 사건으로 문화부가 진흥원에 공문을 보내 사실 관계 파악 등을 요구하면서, 곤욕을 치렀던 조직이기도 합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있는 '한국만화박물관'에서 전시 기획자로 일하고 있는 분을 만났습니다. 이분은 (제가 1년에 한 번 타 대학 수업을 하나 출강하는데) 모교인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하는 강의 <문화행정과 경영>에서 만난 분이었습니다. 매년 이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보유한 좋은 역량을 가진 25명 정도의 수강생을 만나는데, 이 분은 이 중에서도 눈에 띄는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번 인터뷰도 많은 인사이트를 줍니다. 만화를 좋아하거나, 전시 기획자의 꿈을 갖고 계신 20대, 공공 문화예술 조직에서 30대를 보내고 계신 분 중에 마음의 방황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일독을 권해봅니다. 아울러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라는 조직과 이곳 박물관에서 하는 기획 전시도 한번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감동이 지속될 수 있는 길을 내고, 길을 잇고, 길을 닦는
전시 기획자 박혜원
1. 이름은? 사회에서 연차는 어떻게 되시나요?
안녕하세요, 박혜원입니다. 사회에서 연차는 8년, 문화예술행정의 현장에 몸담은 지는 4년 차가 되었네요. 문화재단에서 축제와 관광사업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지금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자리를 틀고 만화라는 장르와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입사 후 진흥원이 운영하는 한국만화박물관에서 교육, 마케팅, 뮤지엄숍 등 다양한 업무를 거쳐 현재는 박물관의 기획전시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2. 어떤 일을 해 오셨나요. 일터(작업의 공간)에서 당신의 역할을 소개해주세요 & 역할 속에서 자신의 직업정체성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은 종종 제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전시를 기획한다고 하면 “그림을 걸어요?” 하고, 박물관에서 일한다고 하면 “유물을 관리하나요?”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일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요. 복합적이고 때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전시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설계하는 일입니다. 현재 저는 매년 약 4건의 기획전시를 주도하며, 전시 주제 선정, 작가 섭외 및 계약, 작품 분석, 공간 연출, 예산 관리까지 전시 기획의 전 과정을 담당하고 있어요. 전시는 하나의 결과물이지만 그 안에서 기획자 한 사람은 여러 역할을 넘나들어야 하는 순간이 많아요. 저는 그중에서도 ‘이 만화를 어떻게 보여줘야 관람객이 더 흥미롭게 받아들일까?’라는 질문에 가장 오래 머뭅니다. 기획자는 결국 예술과 사회를 잇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일을 ‘공간을 문장처럼 써 내려가는 일’이라고 설명하곤 해요. 제가 하는 일은 단지 무언가를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관람객들이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하는 일입니다. 관람객은 그 문장을 따라 걷고, 박물관이라는 공간은 하나의 호흡으로 흐르게 되죠. 그 문장을 쓰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조율하고 배치하는 것이 바로 저의 역할입니다. 만화라는 콘텐츠의 결을 이해하고, 정책의 맥락을 읽고, 예술의 언어를 행정의 언어로 번역하는 사람. 그게 제가 박물관에서 서 있는 좌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한번 떠올려 주시겠어요. 당신이 하는(해 왔던) 일을 선택했던 내적인 욕구, 초심, 계기, 우연 등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원래 관객이었어요. 중고등학교 시절, 공연과 연극을 좋아하는 친구 덕분에 대학로에 자주 갔었죠. 소극장에 앉아 그저 감상만 하다 돌아오곤 했습니다. 무언가를 깊이 알지는 못했지만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 차차 쌓여갔고, 그 경험은 자연스럽게 문화예술경영이라는 전공 선택으로 이어졌어요. 1학년 전공 수업 시간, 교수님께서 “이제부터 관객의 시선이 아니라 기획자의 시선으로 모든 걸 봤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뒤로 저는 축제든 공연이든 전시든 분야를 가리지 않고 쫓아다녔던 것 같아요. 그리고 매번 그 감동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상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엔 보이지 않던 수많은 기획의 흔적들, 관객석보다는 백스테이지를 더 궁금해하며 기획이라는 일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죠.
하지만 전공만으로는 쉽게 진로가 그려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들어가게 된 첫 직장에서 축제, 관광과 관련된 업무를 맡게 되면서 문화예술행정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그런데 웬걸...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사업이 줄줄이 취소되었고,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운 시기에 축제와 관광 분야는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저 역시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마주하면서 기획자의 역할과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코로나와 맞물려 이 업계를 떠난 기간도 꽤 길었네요. 그리고 오랜 방황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일은 감동을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동이 지속될 수 있게 길을 닦는 일이다.’ 그렇게 만난 것이 바로 ‘만화’였습니다. 사실 저는 대학교 때부터 만화와 가까운 사이였어요. 당시 만화학과 조교로 지내면서 만화학과 학생들과 자주 어울렸고, 학생들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지원사업을 신청하며 예산이나 홍보 계획 작성에 어려움을 겪을 때 함께 고민해 주기도 했습니다. 만화는 누구나 접해본 친근한 매체이지만, 학생들과 창작자들 입장에선 여전히 제도적 지원이 절실한 분야였습니다. 예술로서의 가치나 문화적 의미가 많이 간과되기도 했고요. 제가 대학교 3학년이던 해에야 비로소 문화예술진흥법상 ‘문화예술의’ 정의 개념에 만화가 포함된 것도 기억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한국만화박물관에서 다시 기획자로서 그 길을 닦고 있습니다. 전시 공간은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공간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만화라는 매체는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을 가졌어요. 그래서 저는 만화가 예술로서, 혹은 동시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와 감동을 전하는지 많은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막간 홍보를 하자면) 저는 지금 진흥원에서 진행했던 2024 다양성만화지원사업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9월에 전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근한 장르는 아닐 수 있지만, 깊이 있고 사회적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만화를 소개해 주고 싶어요. 결국 제가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이지 않을까도 생각해요. 예술가의 의도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때론 관람객의 반응을 예술가와 정책 담당자에게 전달하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계속해서 질문하고, 해석하고,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일. 그렇게 문화가 더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드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오늘도 이 길 위에 서 있습니다.
4. 당신이 하는 일에서, 당신이 생각하는 고객은 누구인가요
전시를 보러 오는 관람객, 전시를 함께 만드는 작가, 회사 내부의 동료, 예산을 배정하는 상급 기관까지, 저는 매일 서로 다른 기대와 언어를 가진 여러 존재들과 마주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모두 제 고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작가와는 작품 사용을 위한 저작권 협의를 비롯해 전시 방향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내성적인 성향을 가진 만화가 중에서는 전시에 참여하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설득하는 데 꽤 긴 시간이 소요되기도 해요. 그리고 동료는 기획안을 검토하는 상사는 물론, 전시와 연계된 교육 프로그램이나 마케팅을 기획하는 동료들까지 포함됩니다. 하나의 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내부 고객들의 관점을 이해하고 조율하는 협업이 필수적입니다. 또한 저희 기관은 시 출자·출연기관이기 때문에 예산을 편성하거나 계약을 진행할 때 복잡한 행정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기획자는 정책과 행정의 언어를 이해하고, 때로는 설득하는 역할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전시는 수많은 조율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안에서 저는 각기 다른 고객의 기대와 요구를 읽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많이 염두에 두는 고객은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인 것 같아요. 한국만화박물관을 자주 방문하는 단골 관람객은 물론, 전시를 보러 오게 될지도 모르는 잠재 관람객, 박물관이 낯설고 어렵게 느끼는 이들까지 다양한 유형의 관람객들이 제 고객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관람객의 눈높이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박물관은 전시물과 그에 관한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라 관람객과 소통을 통해 의미를 완성해 가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의 기획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드는 전시’를 만드는 데 닿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4-1. 당신이 생각하시는 고객에게, 당신은 어떤 역할기대와 요구를 받는다고 생각하나요.
저도 다른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전시를 보며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엔 ‘기획자가 전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보다는, ‘내가 이 전시를 통해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에 더 관심이 있어요. 마찬가지로 고객이 저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전시를 통해 작품의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하고, 그로부터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 영감 같은 것들을 끌어낼 수 있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고객들이 느끼는 김정은 기획자가 작품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저에게는 늘 중요한 고민입니다.
만화를 전시로 풀어낸다는 것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만화는 회화나 유물과는 다른 ‘서사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요. 예를 들어 웹툰의 경우(작품마다 차이는 있지만), 한 화에 평균적으로 약 80컷이 들어간다고 해요. 만약 70화 분량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약 5,600컷이 넘는데, 이 중에서 전시에 활용할 60~80컷 정도를 1차로 선별해요. 그리고 스토리의 흐름을 고려하여 그 컷들을 재구성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10~20컷 정도를 전시에 사용하게 되죠. 전시 하나에 보통 4~6 작품을 선정하고요. 단순히 명장면 일부를 발췌해서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자칫 전시가 진부하거나 얕게 보일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만화를 전시라는 포맷으로 어떻게 옮길지, 이 만화에 어울리는 연출 방식은 무엇일지, 전시실 내 관람객 체험을 어떻게 구성할지를 중심으로 작품을 바라봅니다. 너무 억지스럽지 않아야 하고, 친근하되 가볍지 않아야 합니다. 아마 고객들은 제가 그 균형을 잡아주길 기대하지 않을까요?
5. 당신이 하는(해왔던) 일의 시퀀스( '기-승-전-결')는 보통 어떤 흐름으로 이루어지나요?
기
전시 주제를 정할 때는 하나의 질문에서 시작해요. 이를테면 ‘지금 이 시점에 어떤 만화로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까?’, ‘관람객들이 지금 꼭 만나야 할 작품은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들이요. 그리고 그 답은 전혀 다른 분야의 책을 읽거나 전시를 관람할 때, 아니면 누군가와 대화 도중에 문득 생겨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9월에 개막하는 전시는 대학원 과제를 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었어요ㅎㅎ) 보통 전시 개막 6~8개월 전부터 주제 탐색을 시작하는데요, 주제 선정부터 전시 개막까지 기간이 굉장히 짧기 때문에 항상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이 시기에는 관련 도서와 논문, 기사, 기존 전시 사례들을 수집하고 주제와 연관된 만화를 찾아보면서 전시 가능성과 시의성, 예산 등 여러 조건들을 검토하게 되죠. 이에 더해 사회적 이슈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주제를 최종적으로 정합니다.
승
주제가 정해지면 작가 섭외와 작품 선정, 전시 흐름 구성, 공간 연출 구상 등 본격적인 기획 단계로 들어가요. 이와 동시에 각종 행정 업무도 병행하게 되죠. 세부적인 작품 분석은 물론, 전시와 연계한 이벤트나 교육, 홍보 등 여러 분야의 담당자들과 협업도 시작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 출판사, 에이전시 등과 소통하면서 작품 사용 가능 범위에 대해 협의하고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이에요. 이렇게 관객의 요구와 작가의 요구, 행정의 요구를 모두 조율하며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 나가는 단계입니다. 저에게는 이 시기가 가장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것 같아요. 기획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제약과 변수가 많아서 끊임없이 타협점을 찾아야 하거든요. 계획이 바뀌고 수정되는 일도 일상다반사고요.
전
이제 기획안 속의 문장을 현실 공간으로 옮겨야 할 시간입니다. 이전 답변에서 언급했듯이 수천 컷에 달하는 장면 중 어떤 장면을 선택할지, 그것을 어떤 순서와 위치에 배치할지, 조명은 어떻게 할지, 캡션과 패널은 어떤 어조로 쓸지..하나하나가 모두 의미를 갖는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이 과정에선 전시 디자이너, 작가와 긴밀하게 소통하며 세부 사항을 조율하게 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며 긴장을 놓지 않으려 해요.
결
전시가 개막하면 그동안 준비한 모든 것들이 관람객 앞에 놓이게 됩니다. 가장 보람되고 뿌듯한 순간이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그 순간은 정말 잠깐인 게, 아쉬움들이 계속해서 보이거든요. 전시 기간에는 관람객들의 반응을 살피고 연계 교육이나 이벤트를 통해 관람 경험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가요.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결과보고서를 쓰면서 다시 질문합니다. ‘이 전시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결국 이 모든 과정은 다시 새로운 ‘기’로 연결돼요. 전시에서 얻은 경험과 아쉬움이 다음 전시의 출발점이 되는 거죠. 그래서 전시 기획은 선형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계속 순환하며 발전해 가는 나선형 구조에 가까운 것 같아요.
6. 일의 과정에서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혹은 '요구받는 가치'는 무엇이 있나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첫 번째는 진정성입니다. 전시는 결국 누군가의 작품과 이야기를 소개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과정에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그 안에서 나눠야 할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관람객들도 기획자의 진심을 느낄 수 있거든요.
두 번째는 접근성입니다. 본래 대중적이고 친근한 매체인 만화가 박물관이라는 공간에 들어오면서 어려워지거나 거리감이 생기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배경지식이 없어도,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누구나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전시를 만들고 싶습니다. 특히 한국만화박물관은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관람객이 많은 편이라, 설명패널이나 캡션을 쓸 때도 ‘어린이들이 읽었을 때 이해할 수 있을까?’를 늘 자문합니다.
세 번째는 지속성입니다. 전시는 단발성 이벤트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새로운 작가와 그 작품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되거나, 작가들에게는 더 많은 창작 동기를 줄 수 있는 전시를 만들고 싶어요.
요구받는 가치는 제가 일하는 공공기관의 행정 시스템 안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요구받는 가치는 ‘성과’겠죠. 관람객 수, 언론 홍보 횟수, 예산 집행률 등 수치로 측정 가능한 지표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지표를 바탕으로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가 추구하는 가치들과 이러한 행정적 요구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자극적이거나 트렌디한 소재를 다루는 것이 관람객 수를 늘리기 위한 쉬운 방법일 수 있지만 그것이 항상 진정성 있는 전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최근엔 이 두 가치를 조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기획의 방향에 따라 관람객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기고, 그것이 입소문으로 이어져 더 나은 성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배웠거든요. 행정적 성과와 예술적 진정성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려는 시도 자체가 또 하나의 중요한 기획자의 윤리가 아닐까요?
7. (최근 3년 동안) 당신이 특히 해결해보고 싶었던 문제(과제)는 무엇이었나요, (문제) 과제를 만났을 때, 진입장벽 혹은 페인포인트(그동안 해소하지 못한 불편함, 어려움 등)는 무엇이었고, 어떻게 풀어보려고 접근하셨나요
최근 3년간, 그리고 어쩌면 조금 더 긴 시간 제가 가장 해결하고 싶었던 ‘문제’는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문화예술경영을 전공하면서 특히 문화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이 분야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했거든요. 하지만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 그 문턱은 생각보다 높았습니다. 첫 직장인 문화재단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제대로 사업을 해보지도 못하고 계약이 조기 종료되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문화예술행정 분야에 지원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필기에서 1점 차이로 떨어지거나, 면접에서 예비 1번을 받는 등 정말 아쉽고 허탈한 순간들이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이 길이 맞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죠. 한동안은 다른 직업을 가져보기도 하고, 제 전공 분야와는 다른 새로운 공부를 해본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미련이 남더라고요.
페인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문화예술행정 분야는 TO가 적고 경쟁률이 높다는 점, 둘째, 시험을 준비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참고서가 거의 없다는 점. 셋째, 아슬아슬한 변수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대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미련과 후회가 남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결심했죠. ‘한 번 끝까지 가보자..’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감동이 지속될 수 있도록 길을 닦는 사람이 되어보자.’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계속 도전했던 것 같습니다. 문화예술행정은 필기시험에 대비할 수 있는 참고서나 별도의 기출문제가 거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문화예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다 정리했어요. 최근 이슈들을 매일 업데이트하고, 관련 법령들과 현황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나만의 참고서를 만들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식한 방법이었던 것 같아요. 면접 전에는 이것저것 막 준비하기보다는 마음가짐을 다 잡는 데 더 집중했어요. 내 이야기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잘할 수 있는데 현장에서 긴장하게 되면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거든요. 그래서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노력했죠. ‘떨어져도 괜찮다. 다 경험이다.’ 이런 식으로요.
그 결과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 입사하게 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의 기획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입사 이후에도 힘들 때가 종종 있었어요. 새로운 사람들과 업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물론이고,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일들을 맨땅에 헤딩하며 해내야 했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고 현실의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그렇게 간절하게 공부했던 시간과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여기서 포기할 수 없지’ 하면서요.
그리고 다행히 동기들과 주변에 좋은 동료들이 있어서 많이 의지하면서 일하고 있어요. 물론 아직도 배워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많지만, 그래도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커요. 올해는 예산이 많이 삭감되어 업무를 하는 데 더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엔 단단한 기획자나 행정가가 되기 위해선 현장을 이해하고 실무를 익히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치지 않는 마음과 유연한 태도, 그리고 초심을 잊지 않는 자세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체감하고 있어요. 혹시 지금 문화예술행정 분야에 진입을 준비하고 계신 분들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하고 싶다면 끝까지 가보세요! 그 간절함은 결국 나를 만드는 힘이 됩니다. :)’
8. (최근 3년 동안) 당신이 기억나는 '보람의 순간'이 있었다면
1. 하나는 아주 일상적인 변화에서 시작된 일인데요, 수원에서 부천까지 출퇴근을 위해 10년 동안 묵혀 두었던 운전면허증을 다시 꺼냈어요ㅎㅎ 처음엔 대중교통을 이용했는데 환승도 여러 번 해야 하고 시간도 배로 걸리더라고요. 당장 차를 사서 연수를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매일 운전하며 출퇴근하고 있어요. 그 시간이 제게는 작은 자유랄까요.ㅎ 물론 차가 막힐 땐 왕복 세 시간이 걸릴 때도 있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한산한 고속도로를 달릴 땐 기분이 상쾌하고 좋아요. 하려고 하면 못 할 게 없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요즘엔 쉬는 날 근교도 드라이브도 다니며 생활 반경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2. 업무적인 측면에서는 전시가 개막하는 순간이나 외부 공모 사업에 선정되었을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씩 실현될 때 등등.. 아무래도 기획을 하다 보니 정말 많은 순간 보람을 느껴요. 그래도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을 꼽자면,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제가 누군가의 ‘좋은 기억’으로 남는 순간인 것 같아요. 작년에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을 맞아 이탈리아 만화 전시를 기획했고, 올해 상반기까지도 여러 연계 행사를 운영했는데요, 처음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 있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만화가들이 점차 적응하고 즐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특히 올해 초청한 이탈리아 만화가 중 한 분은 쌈장을 너무 잘 드셔서 그걸 기억해 두었다가 작별 선물로 챙겨드렸더니 정말 감동하더라고요. 떠나는 날 ’넌 너무 친절해. 한국에 꼭 다시 올 거야.’라고 말해줄 때 정말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 외에도 부천국제만화축제 기간에 코스프레를 한 관람객들이 박물관에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모습, 2023년 잼버리 대원들이 박물관에 방문해 시원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 등 박물관 현장에서의 많은 순간들이 기억에 남아요. 이런 순간들은 제가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를 상기시켜 주기도 해요.
3. 또 하나는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배움과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좋은 교수님들과 원우들을 만나면서 제 시야가 넓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요즘 참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대학원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실무에 활용하고, 또 이런 인터뷰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한층 더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9. 당신이 가진 내적인 힘들 가운데, 어떤 힘이 강하신 것 같나요(장점, 나다운 것 등)?
선택과 집중, 그리고 회복탄력성이요.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과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취사선택하는 힘이 강하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고민의 결과로 나올 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본능적으로 그걸 판단해서 필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데 큰 시간이 걸리지 않거든요. 이런 힘이 특히 빛을 발하는 건 스트레스 상황일 때인 것 같아요. 일을 하다 보면 정말 많은 변수들이 생기잖아요. 어떤 사람들은 모든 걸 다 걱정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데, 저는 제가 컨트롤할 수 있는 문제인가 아닌가를 먼저 구분하게 돼요. 이런 판단이 서면 몰입하는 속도도 빨라지고,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비교적 빨리 안정감을 찾게 돼요. 물론 때로는 제가 놓친 부분에 아쉬워할 때도 있지만, 그런 경험들이 다음에 더 나은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10. 당신의 생각과 행동에 영감/영향력을 주었던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혹은 저자, 작가 등을 소개해주신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가 재미있게 봤던 만화 중 하나를 소개할까 해요.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춘들의 삶을 다룬 아사노 이니오의 <소라닌>입니다. 작품 제목인 소라닌은 감자의 새싹에 들어있는 독의 이름인데, 이 작품에선 청춘을 시작한 등장인물들의 방황과 고독을 의미한다고 해요.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꿈을 품고 있지만 그 꿈을 향해 나아갈 용기는 부족하고,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자니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난 지금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기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닌데’라는 대사는 지금의 많은 청춘들도 공감하는 보편적인 문제일 거예요. 그런 흐름 속에서 메이코가 다네다에게 던진 "그럼 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밴드 해"라는 대사는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용기 있는 제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다네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 장면은 저에게도 큰 충격이었어요. 그럼에도 남겨진 사람들은 그의 꿈을 이어가며 다시 무대에 서고, 다네다가 만든 음악 ‘소라닌’을 연주하죠. <소라닌>은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아요. 대신 꿈을 향해 살아가는 현실이 무겁고 어려울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보여줍니다. 청춘의 독이 때로는 슬프고 치명적일지라도, 동시에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생각해요.
11. 앞으로 어떤 일(작업, 역할)을 하고 싶나요? 그것을 위해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싶) 나요?
저는 아직 제가 있는 곳에서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올해 광복 80주년 특별전은 박물관의 소장품을 바탕으로 기획했는데, 그동안 현대 만화나 웹툰을 봐왔던 제게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습니다. 시대적 배경이나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공부가 필요했어요. 만화를 읽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참고할 만한 기존의 연구 자료도 많이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당분간은 지금 맡고 있는 역할에서 더 깊이 있는 전문성을 쌓는 것에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만화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전시 연출, 콘텐츠 해석 능력 등 기획자로서의 역량도 더 키워야 할 것 같아요. 장기적으로는 현장과 정책 사이의 간극을 줄이고, 창작자에게 도움이 되는 제도나 사업 설계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문화정책 관련 세미나나 포럼에도 꾸준히 참석하려고 해요. 저는 모든 경험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쌓는 모든 것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기회나 우연한 만남이 언젠가 더 큰 그림의 한 조각이 될 거라 믿고 있어요.
12. 당신을 좀 더 알 수 있는 소셜미디어/사이트/뉴스를 알려주세요.
https://youtu.be/VLJSjc_CjhI?si=MqlvYpDxNfaGCw3s
장석류의 예술경영 인물열전,
"Fusion of horizon".
감동이 지속될 수 있는 길을 내고, 길을 잇고, 길을 닦는
전시 기획자 박혜원 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