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류의 예술로(路)] 2026.03.18
입구에만 불이 켜져 있다
2023년 여름, 당시 정부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킬러 문항'을 없애겠다고 선언했다. 온 나라가 들끓었다. 찬반 논쟁이 이어졌고, 교육 전문가들이 줄지어 등장했다. 수십 년째 반복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 소란 속에서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이 있었다. 킬러 문항이 사라지면 대학교육이 달라지는가. 강의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졸업 후 어떤 삶이 기다리는지는 논쟁의 바깥에 있었다. ‘입구의 공정성’이 곧 교육의 목적이 된 사회에서, 입구 너머를 상상하는 것은 사치처럼 여겨진다.
예술지원 심의도 다르지 않다. 심의 현장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공정하게 진행되었습니다"이다. 심의위원은 이해충돌 여부를 확인하고, 채점 기준은 점점 정교해지고 있으며, 결과는 공개된다. 이 말은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반복된다. 공정성은 높아지는데, 예술인도 사업도 좀처럼 성장하지 못한다. 입구에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고, 그 너머는 어둡다.
공정성이라는 알리바이
공정성이 실질을 잃는 방식은 생각보다 정교하다. 많은 행정조직에서 심의가 필요할 때, 심사위원을 이렇게 선정한다. 심사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신청서를 내야 한다. 접수된 신청자 중에서 추첨으로 심사위원을 뽑는다. 절차만 보면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런데 실제로는 다르게 작동한다. 담당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신청서를 내달라고 부탁한다. 이런 연락을 받게 되면, ‘내가 왜, 이력서까지 써가며 지원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심사 대상 업체 관계자는 지인들에게 신청을 청탁하기도 한다. 정작 진짜 전문가들은 이런 공고를 잘 찾지 않고, 기본 요건만 보고 공고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신청자 풀을 채우는 경우도 많다. 추첨 결과 전문성이 부족한 사람이 뽑히기도 한다. 그러나 담당자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생긴다. "저는 특정인을 섭외하지 않았습니다. 추첨으로 공정하게 뽑았습니다." 공정성이 절차의 언어가 되는 순간, 그것은 책임을 지는 도구가 아니라 책임을 피하는 도구가 된다.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이 경향은 더 강해졌다. 권력이 심의에 개입했던 트라우마가 남긴 가장 강한 반응은 "두 번 다시 불공정하다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방어의 본능이었다. 심의의 목적이 예술의 성장이 아니라, 비판을 피하는 것으로 조용히 바뀐 것이다. 연구에서 만난 어떤 직원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만 욕을 먹고 싶다"고. 공정하게 선정되었는데 왜 불행한가. 공정하게 떨어졌는데 왜 다음이 없는가.
입구가 완성되는 순간, 심의는 끝난다
입구는 점점 정교해졌다. 채점 기준은 세분화되고, 심의위원을 전담제로 전환한 경우도 있으며, 이의신청 절차도 만들어졌다. 제도만 보면 나무랄 것이 없다. 그런데 입구를 통과한 이후가 문제다. 선정된 예술인에게는 모니터링이 기다린다. 그런데 연구에서 만난 예술인들은 그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공연을 하러 가면 심의위원이 언제 오는지, 누가 오는지 아무도 안 알려줘요. 그냥 객석 어딘가에 있겠거니 하고 불안해하면서 공연하는 거죠." 얼굴 없는 평가자가 어딘가에 앉아 있다는 불안 속에서, 창작의 집중은 흔들린다. 또 다른 예술인은 이렇게 말했다. "창작을 응원하는 건지 감시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모니터링이 동반자가 아니라 감독관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정작 예술인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연습실에 와서 지금 어떤 게 제일 힘드냐고 물어봐 주는 동료", "이 작품을 지방 투어로 이어가려면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조언해 주는 사람", "왜 그런 선택을 했냐고 물어봐 주는 비평적 호기심." 감시가 아니라 러닝메이트를 원한다는 것이다. 심의가 예술인을 만났을 때, 이런 맥락을 잘 알고 있는 심의자도 있다. "저는 늘 다음 작업은 뭐냐고 물어봐요. 신진 작가에게 본인 작품이 어떻게 보이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그 작가는 거기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거든요." 이것이 심의의 책임성이 향해야 할 방향이다.
선정되지 못한 예술인의 상황은 더 빈약하다. 왜 떨어졌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다음엔 어떻게 준비하면 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듣기 어렵다. "그냥 내년에 또 지원서 내고 운을 바라는 수밖에 없어요." 모니터링에서 나온 평가 데이터는 당사자에게 환류되지 않고 주로 행정 문서함에만 쌓인다. 성장을 위한 데이터가 보관을 위한 데이터로 낭비되고 있다. 공정성이 완성되는 순간, 심의의 역할도 끝난다. 정교한 입구 뒤에는 텅 빈 여정이 있다.
심의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
심의가 예술을 만났을 때,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이 심의를 통해 예술인이 성장했는가. 선정된 예술인은 지원을 발판으로 더 깊은 창작으로 나아갔는가. 선정되지 못한 예술인은 피드백을 통해 다음을 준비할 수 있었는가. 이 질문들은 공정성의 언어가 아니라 성장의 언어다. 심의가 예술인을 판별하는 자리가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자리가 되려면 지금과는 다른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좋은 심의는 공정한 심의가 아니다. 예술인의 다음을 여는 심의다. 선정 여부와 무관하게, 심의를 경험한 예술인이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얻어 갔는가? 그것이 심의의 책임성을 묻는 진짜 질문이다. 입구를 지키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입구 너머를 함께 걷지 않는 심의가 예술을 어디까지 데려다줄 수 있을까. 우리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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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장석류. 성연주, 2026) 아르코 심의의 책임성 연구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