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순이가 집순이인 이유
가끔 누군가가 맛있는 거 먹자고 나오라고 하면 집순이는 여느 때처럼 미적미적 대답을 망설이고 그 친구는 "집에 있으면 뭐 해? 얼른 나와."라고 한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라면 어떻게든 나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안 나가려고 핑계를 대는데, 미국 친구들은 쿨하게 알았다고 하고 한국 친구들은 바로 삐진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나가서 함께 맛있게 먹고는 돌아오는 길이 참 허무하다고 느낀다. 하루를 헛되이 보낸 기분이다.
미각과 후각이 남들보다 예민해서 음식이나 와인의 맛의 미세한 차이까지 구분해 내는 미식가지만 이십 대 이후로는 맛집 앞에서 삼십 분 이상 줄 서본 적이 없다. 어릴 때야 호기심에 유명한 집에 한 시간씩 줄을 서서 기어코 먹어보기도 했으나 그 정도 시간과 노력의 보답이 될 정도로 맛있는 집은 여태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다리는 동안 기대치가 계속 높아져서 그런지 오랜 기다림 후 먹는 음식 맛이 내가 줄 서서 보낸 시간만큼의 가치가 없었던 것이 이유였다.
최상의 맛에서 얻어지는 만족감은 내가 자유롭게 보낸 시간 동안 가지는 만족감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맛은 잠시 느낀 후엔 기억만 남아서 먹고 싶은 욕구로 나타나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낸 시간은 앞으로 겪을 일들에 맞설 수 있는 에너지와 아이디어와 안정감을 준다. 최고의 음식을 먹기 위해 준비하고 이동하고 먹고 다시 돌아오는 그 시간을 집에서 편한 옷 입고 좋아하는 소설책 읽으며 보냈으면 난 소설책 속 상상의 세계로 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던 거다. 음식과 맞바꿀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기억들이 다시 정돈되고 새로운 것이 떠오르고 미래를 계획할 자료가 쌓인다. 나는 유한한 시간을 살고 있기에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낼 때 가장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오롯이 내 마음대로 보내는 귀한 시간에 대해 가치를 매기는 것이 가능할까.
불러내는 친구에게 거절할 때 친구가 삐지지 않도록 더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 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