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이 오면 숨어있던 내가 튀어나온다

인생을 바꾼 순간들

by 류지


아직도 그 순간이 뚜렷하게 기억난다. 1995년 11월이었던 것 같다. 2층 사무실에서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중간에 있던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흐린데 눈이 부시지 않을 정도로만 밝았다. 순간 가슴속에 무언가가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 걸 느꼈고 동시에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하는 의문이 솟았다. 그날 종일 멍한 채 일을 계속했는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듬해 초에 직장을 그만두었고 다른 곳에서 아주 좋은 조건으로 초빙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으나 고민 없이 거절했다. 그다음 해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 순간 하고 싶은 게 떠올랐던 건 아니었다. 그냥 내 안에 억눌렸던 뭔가가 탁 하고 족쇄를 끊고 나온 것이다. 나도 몰랐던 열정이 어느새 모인 에너지를 태우며 가시화되었는데 그걸 현실로 이끌어내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뭘 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지만 두 가지는 뚜렷하게 알 것 같았다, 현재의 삶에 내가 절대 만족할 수 없다는 것과 내가 있는 곳에 머물면 안 된다는 것을. 내 평생 그때가 가장 강렬한 순간이지만 그 이후에도 가끔 그렇게 내면의 내가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난 사는 곳을 바꿨다.


두 번째 순간은 대학원생 때 대학에서 강의도 하며 유학을 준비할 때였다. 수강하는 수업도 있었고 가르치는 수업이 많아서 잠을 줄여 가며 토플 시험과 미국 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강의를 하고 새벽까지 공부를 하다가 토플 시험을 치러 갔는데 듣기 시험 도중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완전히 시험을 망쳐버렸다. 나 자신에게 너무 실망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망연자실 누워 있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대학원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토플 잘 봤어?”

“아니, 나 시험 치다가 잠들었어. 유학 포기해야 하나…”

“언니, 그러지 말고 인도 가. 인도 가서 일 년 있다가 유학 가면 되잖아.”


그 며칠 전 우연히 인도 취업에 대한 정보를 얻었는데 후배가 그걸 이야기한 것이다.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것 같았다. 며칠 후 인도 취업 신청을 했고 인도에서 1년을 보내며 미국 대학원 입학 준비를 해 그다음 해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그 후배는 내게 전화한 적이 없었다. 그 애와의 통화는 다 내 꿈속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시험을 망쳤다는 절망 속에서 내 무의식이 다른 가능성을 찾아내어 꿈을 통해 보여준 것이었다.


그 후로도 그런 순간들이 가끔 있었다. 미국 대학원에 합격한 후 당시 연봉이 고속으로 상승하고 있던 고연봉 직장을 그만둘 때도 반짝하는 순간의 결심이 있었다. 연구소에서 일할 때 직속상관에게서 오랜 괴롭힘을 당하던 중 어느 날 문득 텍사스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재택근무 허가를 받아 학대의 현장에서 벗어났다. 삶에 대한 의욕이 흐려지고 있을 때 갑자기 샌프란시스코로 가야겠다고 결심했고 1년을 지내며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되어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탁 치듯이 떠오르는 생각이 길을 잃은 내게 기회를 제시한다. 그럴 때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그건 항상 현재의 안정을 건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바로바로 결정하고 실행한 내가 아주 대견하다. 잘했어, 토닥토닥.










작가의 이전글여행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