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도 없이 오랜만에 함박눈이 내리던 어느 저녁, 근처에 사는 다카코貴子상이 잠깐 들렀다. 오렌지색 란도셀을 한 손에 들고. 자초지종을 들으니 민재가 오늘 학교에서 뜬금없이 란도셀이 갖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삿포로 중학교에 진학한 가쿠토가 쓰던 란도셀을 여기 있는동안 민재에게 빌려주겠다고. 가쿠토도에게도 전화로 흔쾌히 허락을 받았단다. 한 번도 민재에게 직접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없어 반신반의하며, 민재, 정말 란도셀이 갖고싶어? 하고 물으니 수줍게 고개를 끄덕인다. 녀석, 반 아이들이 모조리 란도셀을 들고 다니니 본인만 란도셀과는 전혀 다르게 생긴 천가방을 드는게 뭔가 아쉬웠나보다. 평소에 무언가를 갖고 싶다거나 사달라거나 하는 적이 거의 없는 민재인지라 뜻밖이기도 하고 오렌지 색 란도셀을 보자마자 반짝이는 눈을 보니 녀석 정말 갖고 싶긴 했나보다.
기껏해야 두 달 다니는 일본학교를 위해 란도셀을 살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보았다. 학용품도 그리 많지 않은지라 예전 국제학교에 다닐 때 사용하던 천가방으로 충분할 것이라 판단했다. 일본 초등생들이 다들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소가죽으로 만든 란도셀은, 매우 튼실해보이기는 하지만 왠지 두껍고 무겁고 딱딱하다는 이미지를 이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두툼한 란도셀을 등에 지고, 거기다 실내화나 다른 준비물을 둘러메고 등교하는 초등학생들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마저 들곤 했다. 듣자하니 가격도 4~5만엔은 족히 하니 평범한 백팩과 비교하면 4~5배는 비싼 편이다.
다카코상이 란도셀을 열어 이리저리 돌려가며 설명해준다. 나도 덕분에 생전 처음으로 란도셀이라는 녀석을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만져보게 되었다. 의외로 처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 달리 란도셀은 그다지 무겁지도 않을 뿐더러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꼼꼼이 디자인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가쿠토가 쓰던 란도셀은 특별히 거동이 불편한 장애아들을 위해 특별 주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돌아가신 다카코상의 아버지께서 가쿠토의 입학선물로 주셨다고. 민재가 물려받아 사용하게 된걸 아시면 아버지가 기뻐하실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마음이 뭉클해진다. 결국 민재가 일본학교를 다니는 3월 말까지 잘 쓴 뒤에 돌려주기로 했다.
일본인들에게 란도셀은 초등학교 6년을 줄곧 함께 하는 동반자이다. 막부 말기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네덜란드의 백팩을 의미하는 ‘ransel’이 일본식 발음으로 굳어져서 란도셀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동들이 멋진 란도셀을 들고 학교에 간다는 기대에 부풀어, 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불안을 자연스레 떨쳐내게 하는 구실이 되기도 한다. 보통 남아들은 검은색, 여아들은 빨간색을 선호한다. 4~5만엔을 호가하는 고가인지라 가난한 집 부모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기도 하고(그래봤자 우리나라 등골브레이커에 비할 바 아니지만), 싸구려 란도셀을 들고 다니다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는 일도 있다고 한다. 6년을 함께 한 란도셀은 그대로 추억의 소장품이 되어 집집마다 보관되는 경우가 많은데, 부피가 크다보니 최근에는 사용하던 란도셀을 사이즈를 줄여서 미니 란도셀로 만들어주는 비즈니스도 생길 정도이다. 재작년인가 미국의 한 여배우가 란도셀을 패션아이템으로 들고 다니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란도셀을 들고 다니는게 유행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검은색도 빨간색도 아닌, 고급스런 오렌지색의 란도셀을 받은 민재군,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다카코상이 떠난 뒤에도 집에서 내내 란도셀을 매고 다니더니, 급기야 란도셀을 맨 채로 엎드려서 책을 읽는다! 이러다가 란도셀 매고 자겠다고 할 판이다.
민재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귀한(?) 소장품을 선뜻 내주는 다카코상의 배려와 선한 마음이 느껴지는 눈내리는 밤이다. 가쿠토에게 고맙다고, 오렌지색 란도셀을 맨 민재 사진을 붙여 엽서라도 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