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유난로, 따뜻함의 근원
한밤중 응급상황 발생
두꺼운 이불 속을 스물스물 스며드는 한기를 느끼며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각. 분명 등유스토브의 실내온도를 20도로 맞춰놓고 잤는데, 이렇게 춥다니. 확인해보니 아니나다를까 스토브가 꺼져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다시 스토브 스위치를 켜 보았다. 불이 붙을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니 일단 기다려보자. 안쪽에서 불을 붙이려는 딱 딱 딱 소리는 나는데 웬일인지 불은 붙지 않는다. 고장인가 싶어 제품 메뉴얼을 찾아 패널에 뜬 기호를 확인해보았다. 이럴수가, 고장이 아니라 스토브 등유가 바닥이 난 것이다. 한밤중에는 영하 20도까지도 쉽게 떨어지는 엄혹한 홋카이도의 겨울인지라 난방은 이 곳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과장안하고 생명이 걸린 문제이다. 이 한밤중에 유일한 난방원인 스토브가 꺼지다니, 응급상황이 발생한 것에 다름 아니다. 등줄기가 오싹해진다.
실내온도를 확인해보니 13도. 일단 고베에서 가져온 작은 전기스토브를 부랴부랴 아이들 자는 방쪽을 향해 틀어놓고 있는대로 옷을 껴입었다. 일단은 아침이 밝을때까지 버텼다가 체험하우스의 담당자인 나리타씨에게 연락을 하기로 했다. 영하의 날씨에 캠핑한 적도 있는데 까짓거 이 정도야 하는 대범함을 가지려 애쓰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하필이면 이 날이 일요일. 쉬는 날에 아침부터 전화를 하는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얼어죽는거보다야 미안한 편이 훨씬 낫지 하며 8시가 되어 나리타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우리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나리타씨는 서둘러 우리 집으로 와서 커다란 등유 탱크가 바닥이 난 것을 확인, 곧바로 등유공급회사에 전화를 거는 한편 역장(우리나라로 치면 동사무소)에 보관된 임시스토브를 차로 실어 가져다 주었다. 일요일 아침 8시에 과연 얼마나 이 사태가 얼마나 신속히 해결될지 걱정스런 마음으로 지켜본지 5분이 될까말까, 등유를 실은 트럭, 바꿔말하면 우리의 라이프라인이 보무도 당당히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불을 지키는 절실함
트럭을 몰고 온 우리의 해결사는 눈이 50센치는 족히 쌓인 우리집 뒤뜰을 헤치고 탱크로 접근, 400리터짜리 커다란 탱크와 트럭의 탱크를 연결하니 순식간에 등유 주입 완료. 너무 쉽게 끝났군 하는데 급유를 마친 분이 난방과 급유기기를 확인해야 한다고 집으로 들어왔다.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묵고 있는 집에서 사용하는 FF식 등유스토브는 등유가 고갈된 채로 스토브가 작동할 경우 등유 대신 공기가 파이프를 통해 일부 들어오기 때문에 연소가 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탱크가 고갈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점검하고 등유를 채워넣는 일이 중요하고 거를 수 없는 일과라는 것을 깨달았다! 좀 과장하자면 원시사회에서 불을 지키는 절실함으로 등유를 지켜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사태는 이 집의 관리 담당자인 나리타씨의 관리태만이 부른 결과라 볼 수도 있겠다. 스토브와 급유보일러에서 각각 공기를 빼는 작업을 하니, 아니나다를까 그제서야 스토브는 빨갛게 불이 붙고, 수도꼭지에서 뜨거운 물이 나온다! 만세~! 나리타씨는 거듭 페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허리를 굽혀 사과를 한 후 돌아갔고, 이로써 비상사태는 무사히 종료되었다.
홋카이도의 난방원
겨울이 거의 반년동안 지속되는 홋카이도. 옛날 아이누들이 부족형태로 살던 시절이야 모닥불과 곰가죽을 비롯한 동물가족을 껴입고 겨울을 견뎠다지만, 현대의 홋카이도의 난방원은 주로 등유, 가스, 그리고 전기이다. 단독주택이 많은 홋카이도는 특히 등유를 이용한 스토브로 집 전체를 데우는데 우리가 자주 몇개월씩 묵는 이 곳 히다카는 특히나 대부분 단독주택이기 때문에 거의 다 등유를 난방원으로 사용한다. 처음 이 동네에 왔을때 집집마다 앞에 놓여있는 커다란 탱크가 뭐지, 했던 것이 바로 겨울내내 사용할 등유를 저장하고 스토브로 직접 공급할 수 있게 설계된 등유탱크였던 것이다. 보통의 실내용 등유난로와 다른 점은 스토브로부터 파이프가 외부로 연결되어 있어 연소 중 이산화탄소가 배출되기 때문에 일부러 환기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고베에서 쓰는 등유난로는 1시간에 한 두번 환기를 해야해서 귀찮기도 하거니와 들어오는 롯코산 찬공기를 참아야 해서 매번 고달팠는데 여기서는 그런 번거로움이 없다. 게다가 집이 작아서인지 스토브 한대로 온 집안이 따끈따끈, 고베에 있는 3층 집에서 벌벌 떨며 지내는 겨울에 비할바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들은 홋카이도가 고베보다 겨울에 따뜻하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따뜻함의 근원은 바로 등유인 셈이다.
산촌민주주의. 에너지 자원의 미래를 생각하다
홋카이도에서 6개월이라는 오랜 겨울과 혹한을 견디려면 꽤나 많은 연료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일본은 에너지 소비가 높은 선진국임에도 에너지 부족국가인데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원자력 에너지를 중단해야 한다는 움직임까지 더해, 에너지자원에 대한 걱정과 관심이 매우 높다. 친구의 권유로 최근에 ‘숲에서 자본주의를 껴안다(원제: 里山資本主義)’라는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제시된 산촌자본주의는, 몇 년전 NHK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은 것인데, 국토의 66퍼센트를 차지하는, 그러나 석유에너지에 의존하면서 방치되어버린 산림을 에너지 자원으로 활용한다는 발상에서 시작됐다. 미래에 고갈될 운명인 석유와 위험 천만의 원자력에 의존한 채 불안한 미래를 걷고 있는 자본주의를 극복 내지는 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서브시스템으로 말이다. 지역 각지의 선구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재생가능한 자원인 산림이 현대적 설비(자본주의의 산물인)를 통해 효율높은 에너지원으로 거듭나는 과정과 외국의 선진 사례들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선진화된 목재가공기술을 이용하면 7~8층짜리 목조 건물도 지을 수 있고, 이것이 시멘트와 철강으로 지은 건물보다 오히려 더 튼튼하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이다. 숲과 나무, 나무로 만든 모든 것을 좋아하는 나인만큼 절로 박수가 나오는 대목이다. 원자력 에너지의 숨겨진 발톱을 뼈아프게 경험하고, 석유자원 100%를 전량 수입해야 하는 일본으로서는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아니, 내가 일본 정부 책임자라면 각 지자체와 합의해서 강하게 밀어붙이고 싶은 정책이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흔한 드럼통과 파이프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친환경스토브의 사례가 어쩌면 그 작은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산림자원을 바로 가까이에서 구할 수 있는 지방 산촌의 경우, 주변에 널린 자잘한 나무 몇조각만으로도 쉽고 빠르게 식사를 만들 수 있는 친환경 스토브 하나만 가지고 있으면, 재해로 인해 전기도 석유도 끊기는 응급사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요리를 위한 연료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우리도 에코스토브 하나쯤은 마련해놔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우리가 체류중인 이곳 히다카日高마을은 지역 전체 면적의 95%가 삼림이니, 이 산촌민주주의를 시도해볼만한 더없이 적당한 곳이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30년 전만해도 임업으로 먹고 사는 부유한 동네였는데, 목재 소비가 줄어들고 임업은 쇠퇴하여 인구는 10분의 1로 줄어든 곳이 바로 히다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방치된 산림은 울창해질대로 울창해진채 사방에 뻗어 있다. 한 10년 뒤 쯤, 등유가 아닌 나무로 만든 에너지원료인 펠프를 실은 트럭이 와서 우리집 연료탱크를 채워주는 미래를 그려보는 것은 무리일까.